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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그의 길 위에서 생각한다 <41> 풍월도의 실현, 화랑

풍류정신 담은 글 ‘난랑비기’ 완성… 비로소 갓·신발 남기고 길 떠나다

  • 국제신문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20-11-15 19:08:17
  •  |  본지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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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라 충성하며 부흥 이끈 풍월도
- 전통 신앙·도 결합 뿐만 아니라
- 원광법사 세속오계 계율로 삼아

- 치원, 그 정신 밝히고자 붓 들어
- 부모에 효도, 나라에 충성 등
- 유·불·도 담은 ‘현묘한 도’ 기록

- 글 보존 과정서 본문 사라지고
- 서문 뜻만 삼국사기에 전해져

- 누구보다 지혜롭고 강인한 아내
- 떠나고자 하는 남편 잡지 않아
- 치원, 자유 찾아 다시 방랑의 길

신라의 삼국통일과 융성은 진흥대왕(540~576년 재위)께서 다진 기틀에 힘입은 바 크다. 대왕께서 “나라를 융흥하게 하려면 반드시 풍월도(風月道)를 진흥시켜야 한다” 이르시니 양가(良家)의 남자 중 덕행이 있는 자를 뽑아 화랑(花郞)이라 하고 설원랑(薛原郞)을 국선(國仙)으로 삼으니 화랑국선의 시초였다. 풍류(風流)라고도 불린 풍월은 오래전부터 있어온 청년인재 양성의 전통에 기반한 것으로 진흥대왕 이전부터 국토를 순행하며 심신을 단련하고 서로에 대한 믿음과 나라에 대한 충성을 다졌다. 불교가 전래된 뒤에는 전통 신앙 및 도가와 결합하여 일정한 사상적 체계까지 갖추었으니 뒷날 원광법사의 세속오계(世俗五戒)를 계율로 삼은 것이 대표적이다.

무릇 나라의 강건함은 그 무엇보다 왕과 신민이 혼연일치되는 힘이 먼저이니 그에는 개별적인 신앙을 뛰어넘어 모두의 중심이 될 사상과 선도(先導)할 집단이 필요하다. 진흥대왕께서는 그 점을 간파하여 전래신앙과 유·불·도를 아우르는 풍류도를 사상적 기반으로 삼고 화랑을 앞세웠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300여 년 세월이 흐르니 풍류도는 이름조차 희미하고 화랑도 유명무실해져 나라는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이제 와서 다시 풍류도를 되살린다 하여 이미 기울어진 나라가 다시 바로 세워질 것 같지는 않다.

다행히 곡령(송악)의 그가 불심 깊고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다 하니 다소 마음이 놓인다. 하지만 어찌 나라의 경영이 오직 종교인 불심에만 의지할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불가의 승려들 중 적지 않은 수가 석가의 초심에서 벗어나 갈등까지 깊지 않은가. 도가 역시 우려되는 바가 또렷하니 종교는 오직 개인의 몫일 뿐이다. 유학 역시 권력의 수단으로 변질된 데다 애초 동국의 기질과는 다른 근본이니 오롯이 따를 바도 못 된다. 이에 동국에 맞는 정신적 중심을 풍류도로 삼아 새롭게 밝혀두고자 함이고 오랫동안 고심하며 초고를 여러 차례 수정도 하였다가 이제 비로소 마지막 붓을 들 수 있게 되었으니 벅차고 후련하다.

■우리의 현묘한 도, 풍류

   
아내와 식솔을 두고 떠나는 고운 최치원. 갓과 신발만 남기고 자신을 감추자니 절이라도 해야 작별하지 않았을까 싶다.
‘난랑비기(鸞郞碑記)’.

글의 제목이다. 어찌 300여 년이 흐른 지금 한 사람 화랑의 이름을 내세우랴. ‘난랑’은 기린·봉황·거북·용과 함께 왕도정치가 실현되는 오령(五靈)의 세계를 이룬다는 난조(鸞鳥)에서 차용하여 풍류도와 화랑의 장엄한 뜻을 밝히려는 것이니 누군가 이를 비에 새겨 후세에 길이 전하며 동국의 정신을 잃지 않게 함을 바람이다.

이제 ‘서(序)’를 쓴다.

‘우리나라에는 현묘(玄妙)한 도가 있으니 이를 풍류(風流)라 한다. 이를 가르치는 근원은 선사(仙史)에 상세히 실려 있거니와, 실로 이는 삼교(三敎)를 포함한 것으로 뭇 생명체와 접촉하여 이를 교화한다. 집에 들어와서는 부모에 효도하고, 나아가서는 나라에 충성을 다하니 이는 노사구(魯司寇·노나라 공자)의 주지(主旨)와 같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인위(人爲)가 없고 말없이 행하는 것은 주주사(周柱史·주나라 노자)의 종지(宗旨)와 같으며, 모든 악한 일을 하지 않고 모든 착한 일만 받들어 행하는 것은 축건태자(竺乾太子·석가)의 교화(敎化)와 같다.’

우리에게 현묘한 도는 말은 달랐으나 그 뜻은 이미 유·불·도를 모두 포함한 것으로 ‘풍류’라 하였으니 전래된 대로 따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정신으로 오롯함을 밝혔으니 얼마나 당당한가!

   
최치원의 가족이 머물렀던 터에 지금은 해인사 산내암자 고운암이 들어서 있다.
치원은 이어 본문도 썼을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은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37년(576년)조 기사에 서문만 실려 있으니 오늘날에는 ‘난랑비서’로만 전해진다. 무려 300년을 더 거슬러 올라가 실린 것은 ‘삼국사기’ 편찬이 고려시대에 이뤄졌으니 그럴 수 있는 일이다. 글은 어떻게 전해졌을까. 최치원이 사라진 뒤 누군가에 의해 글은 발견되었지만 비로 새겨지지는 않은 것인가. 글의 보존 과정에서 본문은 사라졌기에 김부식도 더는 쓰지 못했겠지만 서문의 뜻이나마 남기려한 것은 참으로 옳았고 후손으로서는 고맙다. 허나, 아쉽다. 기적이 있어 원문이 발견되거나 비석으로 새겨져 어느 날 문득 땅속에서 햇빛 밖으로 나온다면 우리에게 얼마나 든든한 정신적 지주가 될까. 간절히 빌어본다.

붓을 내려놓은 치원은 먹이 마르기를 기다려 종이를 곱게 접어 서안 위에 반듯이 놓아두고 자리를 일어선다. 집으로 갈 것이다. 방을 나와 문을 닫은 치원은 청량암 법당을 향해 합장하고 허리를 굽혀 서슬 퍼런 기운에 감사드린다.

■당당한 신라 여인들

   
법보사찰 가야산 해인사로 가는 숲길.
안해는 밤새 흐느낌 같은 신음을 멈추지 않는다. 잠귀 밝은 사람이 함께 나눈 술 몇 잔에 여명이 들도록 곁을 지키고 앉은 치원을 의식하지 못하니 다행인가 싶기도 하다.

화랑의 처음은 원화(源花·여성 화랑) 남모(南毛)와 준정(俊貞)이었듯, 무영이 그러하듯 신라의 여인들은 당당하고 주장이 또렷하며 활달하다. 그러나 안해는 묵묵하고 다소곳했다. 천성이 그러하기도 했겠지만 어찌 여인으로서, 한 존재로서 당당하지 않고 싶었겠나(당당하고 싶지 않았겠나). 자신 때문이다. 왕에게 총애받고, 골품을 뛰어넘는 서슴없는 처신으로 질시의 눈총이 따가우니 안해로서는 더욱 몸을 낮출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늘을 드리웠고 짐이 되었다.

부부란 무엇인가. 서로가 공경하고 품어주고 떠받들어야 하는 것이나 자신은 오로지 받기만 했다. 뜻을 믿어주었기에 기대에 부응하는 것으로 갚으리라 했지만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였다. 이룰 수도 없게 되었다. 죄를 지은 것이다. 다시 돌아오지 않으면 죄를 더하는 것일까. 짐을 내려주는 것이니 죄가 되지 않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렇거나 쉬 흐트러지지는 않을 것이다. 지혜롭고 강인하니 뜻을 알아 길을 찾으리라. 그로서 위안을 삼으리라.

여명이 점점 밝아온다. 치원은 일어나 안해의 머리맡에 정중히 절하고 다시 일어난다. 갓이 없으면 또 먼 길을 떠났나보다 할 것이다. 그렇다, 먼 길이다. 가슴은 처연하지만 눈물은 비치지 않으리라. 살며시 방문을 여니 안해는 기척을 느끼지 못한다.

산중 깊은 곳의 작은 초막. 처음부터 영원히 살지 못할 것을 알았기에 마음이 무겁지는 않다. 그래도 길을 나서니 자꾸 돌아보게 된다. 산등성이 한 곳, 이제 더는 초막이 보이지 않을 것이니 치원은 걸음을 멈춘다.

한참동안 눈길을 거두지 못하는 초막 마당에 안해의 모습이 보인다. 역시나 차분한 일상의 움직임이다. 비로소 마음이 놓인다. 치원은 다시 초막을 향해 단정히 절하고 일어나 앞쪽 바위 위에 갓과 신발을 벗어 올려둔다. 누가 찾게 되려나. 어쩌면 무영이지 싶다. 맨발. 얼마나 걸을 수 있으려나. 그때는 학이라도 불러야 하나, 구름을 불러야 하나. 모를 일이다. 모든 것이 미리 정해서야 어찌 자유가 되겠는가.

김정현 객원논설위원·작가

일러스트 = 백정록 / 제자(題字) = 이희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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