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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그의 길 위에서 생각한다 <43> 불일폭포와 청학봉 백학봉

아직 무릉도원으로 나아가지 않았으나, 충분히 고요하니 선계로다

  • 김정현 객원논설위원
  •  |   입력 : 2020-11-29 19:31:01
  •  |   본지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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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중 차나무잎 덖어 끓여 마시니
- 청량한 차 같고 은은한 술 같아라

- 불일폭포 향하는 가파른 암자길
- 흐르는 물결 장관 ‘완폭대’라 새겨
- 청학과 백학 날갯짓 절로 감탄

- 불일평전에 처음 본 초막 있어
- 가보니 무영이 밭 일구며 기거
- “끝까지 모시려 기다렸습니다”
- 소반에 솔송주까지 곁들여 대접

- ‘난랑비서’로 전해지는 풍류도
- 자연과 인간 합일정신 담아내
- 나라와 백성이 온전한 이유

산중 곳곳에 차나무가 야생으로 자라니 이른 봄 찻잎을 따 덖어두면 한 해 차 걱정, 술 걱정은 없다. 청량함으로 마시면 차요, 은은함으로 마시면 곧 술이니 말이다. 차를 마시면 진감선사가 떠오른다. 향을 사르면서는 “나는 이 냄새가 어떠한지 모른다. 마음만 경건할 뿐이다” 하시었고, 차를 음미하면서는 “나는 이것이 무슨 맛인지 모른다. 뱃속을 적실뿐이다” 하셨으니 그 담박함과 검약함은 진정한 불제자의 표상이 아닌가. 육신은 비록 다비를 거쳐 사리만 남겼으나 정신은 혼으로 남아있을 것인데 한 번도 찾아주지 않으시니 그리우면 불일암(佛日庵)을 찾는다.

   
지리 10경에 속하는 높이 60m에 달하는, 하동 쌍계사 인근의 불일폭포. 이 폭포 아래쪽 깊은 골짜기 옥천대 바위 아래 어디쯤에 무릉도원으로 이어진 신선의 터가 있었다고 전해지나 접근조차 어렵다. 하동군 제공
깊은 골짜기를 거슬러 불일폭포를 향해 암자로 오르는 길은 석벽처럼 가파르지만 이미 몸은 구름처럼 가벼우니 숨소리는 고요하다. 도중 만나는 머리 위 암자에 승(僧)의 기척이 있지만 이내 출타할 것이다. 암자가 비기를 기다리는 사이 치원은 철필을 꺼낸다. 이곳에 서면 폭포가 한 눈에 들어오니 진작부터 이름을 남겨두고 싶었기에 길가 바위에 ‘완폭대(翫瀑臺)’라 새긴다. 그 사이 승이 문을 나서 산 아래로 내려가니 치원은 암자에 든다.

좁은 암자 마당에서 좌우를 살피면 폭포 옆 왼쪽 봉우리와 건너편 오른쪽 봉우리가 장엄하게 우뚝하다. 청학(靑鶴)을 부르면 좌측 봉우리에서 날아오고, 백학(白鶴)을 부르면 오른쪽 봉우리에서 날아오니 각각 청학봉, 백학봉이다. 불일암 아래에 ‘환학대(喚鶴臺)’라 이름 새겨둔 곳이 있지만 오늘은 이리로 학을 불러볼까 싶다. 청학을 부를까, 백학을 부를까. 양팔을 펼쳐 날갯짓처럼 아래위로 흔들다 오른팔을 드니 건너편 봉우리에서 백학이 날개를 펼친다. 저 날개에 실려 오늘은 어디를 유람하며 돌아볼까. 하늘은 청명하고 바람은 부드럽다. 학의 날갯짓 아래로는 한 점 구름이 따르니 학을 탄 것이기도 하고, 구름을 탄 것이기도 하다. 땅 위 사람들에게는 그저 무심한 한 조각 구름이리라.

지리산 자락을 두루 돌고서 그만 돌아가려는데 옥천대 아래 불일평전에 이전에 없던 초막이 세워지고 밭이 일궈져 있다. 누군가 환란을 피해 산속에 든 것인가 싶으면서도 인연이 느껴진다. 치원은 환학대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불일평전에 든 인연

   
굴피나무 껍질로 지붕을 인 두 칸 작은 집이다. 지난 가을에나 지은 성싶고 인기척은 없다. 집 주위로 밭을 일궈 수수, 메밀, 콩 등속을 심었다. 앞마당에 제법 큰 못이 있으니 물 때문에 수고롭지는 않을 듯싶다. 못 주위에 고운 들꽃도 옮겨 심어 울긋불긋하니 여인인가 싶기도 하다. 밭을 일구지 않은 경사진 땅에는 거적을 깔고 산나물들을 삶아 널었다. 아이들 흔적은 보이지 않으니 부부라 해도 바지런한 손들이다.

“역시 이리 선인(仙人)으로 계셨습니다.” 문득 들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뜻밖에도 무영이다. 산중 남자의 복색이고 검 대신 호미를 들었다. “자네가 여기에 왜?” 무영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절을 한 다음 고개를 들어 답한다. “가야산에 남겨두신 갓과 신발은 부인께 전했습니다. 뜻을 아시는 듯 잠시 눈물은 비치셨지만 곧 밭으로 드셨습니다.” “그럼 자네는 자네 길을 가야지 어찌?” 무영은 부끄러운 빛을 띤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시려 마음먹었고 그리 말씀도 드렸습니다.” 치원은 난처한데 무영은 담담하다. “지난 가을에 보리를 심어 봄에 수확해두었듯이 제 양식은 항상 넉넉할 것입니다. 저기 툇마루에 잠시 앉으시지요.”

   
최치원이 불일폭포를 감상했다는 완폭대. 하동군 제공
아궁이가 보이는 칸으로 들어갔던 무영이 소반을 들고 나와 툇마루에 내려놓는다. “그간 술은 어찌하셨습니까?” 치원은 주변을 둘러본다. “좋은 차나무가 흔하니 낮에 마시면 차고 밤에 마시면 술이지 않은가.” 무영은 소반 위의 주병을 들어 잔에 따른다. “오는 길에 천령(함양)에 들러 솔송주 담그는 법을 배웠습니다. 봄에 송순과 솔잎을 따서 담가 흉내는 냈습니다.” 치원은 반갑게 잔을 들어 향을 맡는다. “솔향이 그윽하군. 진정 신선의 향일세.” 기쁘게 잔을 비우니 무영이 젓가락을 건넨다. “지난 가을 주워 저장한 도토리로 묵을 쒔습니다. 산나물도 무쳤으니 안주로 하십시오.” “모두 신선의 것이로군.”

선인에게 차는 술이고 술은 차이니 취함은 없고 그저 속이 따뜻할 따름이다. “이제 검은 손에서 내려놓았는가?” “다시 산을 내려가지 않을 것이니 녹여서 낫으로나 쓸까 합니다.” 말해놓고 무영은 문득 드는 생각에 묻는다. “육고기를 좀 말려둘까요?” 치원은 허허롭게 웃는다. “몸이 무거워져서야 어찌 구름을 부르고 학에 오르겠나.” “무릉도원은 아름답습니까?” “바위틈으로 길은 나 있는 듯싶은데 아직 더 나아가보지 않아 도원은 알지 못하네만 지금도 충분히 고요하네. 자네도 들고 싶은가?” 무영은 고개를 젓는다. “아직은 여기에서 술을 빚어 선생님을 모시겠습니다.” 치원은 고개를 끄덕인다. “고마운 일이네. 내가 상대해줄 테니 한가롭게 바둑을 익혀두게, 혹여 도원으로 들어갈 길이 열릴는지.” 무영은 세속의 다툼은 한마디도 입에 올리지 않는다. 이미 선계에 한 발은 들여놓았나 보다.

■우리만의 철학, 풍류도

   
불일폭포에 오르기 전 만나는 산중의 평전인 불일평전. 폭포까지는 걸어서 10분 걸린다.
아귀의 세상은 모두를 아귀로 만들지 않으면 도망쳐 숨거나 죽게 한다. 치원도 서국(중국)에서는 세속적 성공에 마음을 둔 적이 있지만 귀국 후에는 오직 나라와 백성만 생각했다. 기울어져가는 나라가 바로서야 백성이 평안할 수 있기에 시무10여조를 비롯한 여러 진언을 올렸으나 대왕께서 수긍하셔도 세도가의 반대에 실행은 이뤄지지 않았다. 좌절과 보이지 않은 희망에 은거했으나 상처는 아물어지지 않았다.

이제 선인이 되어 미련도 기대도 없는 빈 마음으로 내려다보니 인간의 세상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 같다. 욕망 때문이다. 분노를 등에 업어 기치창검을 높이는 거기에는 욕망이 없을까. 아니다, 또 다른 욕망이다. 분노의 함성이 크고 환호의 열광이 뜨거울수록 욕망은 더욱 커진다. 마침내는 귀까지 멀어져 환호가 원성으로 바뀌어도 듣지 못한다. 송악(개성)의 그가(왕건) 주인이 되면 역사의 쳇바퀴가 달라질까. 그 다음은, 천 년 뒤는…. 아직 가보지 않았지만 크게 다르지 않을 듯싶다. 하지만 욕망은 버리지 못해도 변화는 꾀할 수 있을 것이다. 풍류도를 정리한 이유다. 우리만의 사상과 철학으로 자연과 인간의 합일정신을 놓지 않는다면 권력의 욕망이 아무리 거칠어도 나라와 백성은 온전할 것이기에.

2020년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 무엇보다 우리에게 우리의 정신이라 할 그 무엇은 있는가. 우리는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의 합일을 제대로 생각한 적이 있는가. 최치원 스토리텔링을 기획하며 관점을 풍류도에 둔 까닭이다. 오직 ‘삼국사기’에 ‘난랑비서(鸞郞碑序)’로 그 서문만 전해짐은 안타깝기 그지없으나 최치원이 사라지고 200년이 더 지나 그 서문이나마 기록해 둔 혜안에는 새삼 감사한다.

김정현 객원논설위원·작가

일러스트 = 백정록 / 제자(題字) = 이희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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