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동 고심정사 공양 책임지는
- 70대 정미아·60대 이필연 보살
- 결혼 후 평탄치 않았던 정 씨
- 사업 실패에 빚까지 힘겨웠지만
- 부처님 말씀대로 열심히 살아
- 몸과 마음이 편찮았던 이 씨
- 불교 공부 입문하며 절과 인연
- 매일 삼시세끼 차리는 두 사람
- “신도들 맛있다 할 때 피로 풀려”
공양간은 3층에 있었다. 그곳에 들어섰을 때 막 점심시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곁에 딸린 방에서 숙식을 하며 공양간을 책임지고 있는 정미아(75) 씨의 법명은 원심미 보살. 범어사 방장 스님이신 지유 스님이 지어주셨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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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 중구 중앙동 고심정사 공양간에서 이필연(왼쪽) 씨와 정미아 씨가 환한 표정을 짓고 있다. |
새벽 2시30분에 일어나 스님 공양을 시작으로 점심 재료 준비를 하다 보면 같이 일하는 연조 보살님(이필연·69·부산 중구 중앙동)이 출근을 한다. 두 분이 공양간에서 함께한 세월은 15년. 원심미 보살님은 한산도가 고향이고 이모님을 따라 부산으로 온 뒤 결혼해 대연동에 지금까지 살고 계신다. 연조 보살님은 20대 초반에 중앙동 부잣집으로 시집을 와 지금껏 40계단 위에 살고 있다고 했다.
설거지를 끝내고 과일을 깎아 방에 앉았다. 며칠 뒤 코로나 백신을 맞아야 하는 원심미 보살님에 대한 연조 보살님의 걱정으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원심미 보살님이 몸 안 사리고 일을 너무 많이 하셔요. 백신 맞고 하루 쉬셔야 할 텐데 재(齋)도 있고 초하루도 있어, 참 큰일이네.” “연조 보살, 걱정하지 마이소. 더한 것도 견뎌냈는데.”
원심미 보살님의 목소리에 과하지 않은 힘이 배어 있었다. 7남매 장녀인 원심미 보살님은 삼촌과 고모 등 대식구가 모여 사는 집안에서 농사일까지 거들며 학교를 다녔다. 어려서부터 당찼고 운동도 잘해 어느 경기든 “미아가 나가면 일등 한다”고 소문이 나 있었다. 특히 배구는 손아귀 힘이 있어 학교를 대표할 정도로 실력이 좋았다. 보살님의 꿈은 여군. 제복 입은 모습이 멋져 꿈을 키웠지만 할아버지가 중학교를 보내주지 않아 통영에 사는 이모 집으로 나오게 되면서 보살님의 인생은 전환기를 맞았다.
“이모가 통영에 있는 용화사라는 절에 나를 자주 데려 가셨어요. 뭣도 모르고 따라는 갔는데, 자꾸 가다 보니 좋더라구요.” 그러다 일각 스님으로부터 부처님 일대기를 들었는데, ‘팔상록’이라는 책에 적혀 있다는 말씀이 이상하게 마음에 남았다고 했다.
“책을 구해서 세 번이나 읽었어요. 그때 충격이었어요. 세상에 이런 분이 있나, 읽고 나니 부처님에 대한 생각만 나더라고요.” 어린 나이에 밥 해 먹고 학교 다니며 배구 선수까지 하느라 힘들었는데도 부처님처럼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자신도 모르게 들었다고 했다. 그 뒤로 이모 따라 부산으로 오게 되고 스무 살이 넘어 부처님이 계신 곳을 찾아 진주 어느 절에 들어갔다고 했다.
■그렇게 고마운 분이 있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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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미아·이필연 두 보살이 장만한 음식이다. 푸짐하고 정갈하다. |
“몇 해 겪어 보니 아, 여기도 사람이 사는 곳이구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내가 책만 보고 너무 순수하게 생각을 했지. 부처님 세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더라고요.” 그쯤 삼촌이 어떻게 알고 찾아와 따라 내려갔고 이후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고 했다.
“이제야 보살님에 대한 의문이 풀리네. 어찌 저래 사심 없이 사시나 했는데. 보면, 부처님 말씀대로 살아요, 빚 갚느라 참 힘들게 살고 돈도 없고 한데, 저 사람 줘야겠다, 하면 재는 게 없어요, 그냥 주시는 거예요. 진심으로.”
연조 보살님이 본 바에 의하면 생선이나 좀 드실까 회나 고기 같은 것은 거의 안 드신다고 했다. 결혼 후 원심미 보살님의 생활은 평탄하지 않았다. “남편은 택시회사 다니고 나는 식당을 했는데 참 잘됐어요. 그때 처음으로 집도 장만했으니.” “보살님 솜씨 좋지, 부지런하지, 막 퍼주지, 손님들이 좋아라 했겠네요.” 연조 보살님 말에 원심미 보살님이 피식 웃으시더니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남편이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지하수 파는 사업에 뛰어들었다가 친구에게 배신을 당했다고 했다. 그때 집도 날리고 빚까지 떠안아 삶이 한순간 나락으로 떨어졌고, 얼마 뒤 남편도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초상 치르고 애들하고 막막하게 있는데, 이웃에 가깝게 지내던 아주머니 한 분이 찾아왔어요, 나도 아바이한테 받을 돈이 있는데… 하시더니, 차마 달라 소리는 못 하고, 몸만 건강하면 사니까 돈은 천천히 갚으라고 위로의 말을 해 주시더라고요.”
그분이 전세금 일부를 더 빌려주고 나머지는 큰댁 조카들이 보태 집을 얻어줘 그 집에서 5년 전까지 살았다고 한다.
“세상에 그런 고마운 분이 계시더라고요. 조카들도 그렇고. 꾀 안 부리고 돈 버는 대로 갚아 나갔지요. 하루 식당을 두세 군데 돌면서 20년 가까이 갚았는데, 그래도 어디서 또 빚쟁이가 나타나요.”
“보살님은 빚 갚는 도사예요. 아저씨도 돌아가셨고, 보살님이 진 빚도 아닌데, 다른 사람 같으면 떼먹고 진작에 야반도주라도 했을 건데.”
그만큼 아저씨를 사랑하셨냐고, 장난처럼 연조 보살님이 물었다. “그저 내 앞으로 떨어진 일이니까 한 거지. 나중에는 빚 갚는 것도 재미가 있더라고요. 하나 끝나면 그리 시원할 수가 없어요.” 아무런 원망도 없이 빚 갚는 이야기를 적금 붓는 이야기처럼 듣기는 처음이었다. 집을 얻어주었던 아주머니는 아직도 이웃에 살고 계시는데, 그 돈 갚았을 때가 가장 보람 있었다고 했다.
■나도 저랬겠구나, 또 공부가 되고
“나는 여태 돈을 받고 일했지, 연조 보살은 영도에 있는 한마음선원에서 돈도 안 받고 15년이나 공양간 일을 했어요.”
대기업에 다녔던 남편 덕에 평탄하게 살았던 연조 보살님은 갑상선 문제로 몸이 너무 아팠고 아들이 사춘기를 심하게 겪는 바람에 몸도 마음도 편치 않았다고 했다. 그때 대행큰스님과 연이 닿아 절에 다니게 되면서 불교 공부를 시작했는데 그 공부를 대부분 공양간에서 한 셈이라고 했다. “여기 있으면 온갖 사람을 다 겪어요. 나도 저랬겠구나, 하면 또 공부가 되고.”
이젠 아들도 결혼해서 잘 살고 보살님 몸도 건강해졌다고 한다. “작은 외할아버지가 스님이셨는데 중학교 때 절에 가면 산신각 아래 물이 졸졸졸 내려가는 것도 좋았어요. 자주 찾아뵈었는데 저한테는 스님 되라고 안 하시더라고요.”
고심정사(부산 중구 중앙동)는 집에서 가까워 새벽기도 왔다가 인연이 되었고 1년만 해야지, 했는데 그게 어느새 십오 년이 흘렀다고 했다. “그만두려고 하니까 공양간 소임을 잘못 살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좀 더 해보자 해서 3년 했는데 3년 해도 또 그 모양, 그러다 보니까 보살님이랑 마음이 맞고, 일하는 게 재미도 있고. 지금까지 이러고 있습니다.”
공양간 일을 오래 했어도 두 분 다 점심때가 가장 힘들다고 했다. “아침저녁은 괜찮은데, 점심 공양은 신도도 많고 메뉴를 매일 바꿔야 하니까 그게 한계가 있잖아요, 거기다 오신채 안 쓰지요. 옛날에 파 들어가는 거 끓였다가 혼났어요. 여기는 그런 게 철두철미해요. 그래도 드시고 맛있다 하면 하루 피로가 다 풀려요.”
원심미 보살님이 마지막으로 진 빚이 하나 있다고 하셨다.
“그때 세 들어 살던 집이 너무 낡아서 이사를 가려고 알아보니 세가 너무 비싸더라고요. 부동산 사장님이 그러지 말고 융자 좀 받아서 집을 사라고 해서, 빚을 졌지요.” 원심미 보살님 스스로 진 생애 첫 빚이었다. 그 빚도 올 7월이면 다 갚는다는 말에 연조 보살님과 나는 환호를 지르며 박수를 쳤다. “축하합니다, 보살님!”
어느 새 저녁 준비 시간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며칠 뒤 재(齋)가 있다는 날 다시 들렀다. 일 조금 도와드리고 생애 가장 맛있는 비빔밥을 얻어먹었다.
시민기자·소설가 ksh105525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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