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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가경의 부산 사람 인생사 <6> 김석호, 묵향을 택한 인생

대기업 합격 뿌리치고 잡은 붓 … “글씨 너머 중봉의 정신 찾으려했죠”

  • 김가경 소설가
  •  |   입력 : 2021-09-09 19:16:23
  •  |   본지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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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등학생때 부친이 권한 서예
- 공대 진학했지만 포기 못하고
- 석사 수료 후 서예학원 차려

- 국전 입선하며 본격 작가의 길
- 깊은 서예 세계 위해 기 수련도
- “예쁜 글씨 쓰는게 다가 아냐
- 생활에서 선 실천하는 수행”

부산서예비엔날레 사무실에서 서예가 초정 김석호(69·부산 부산진구) 선생을 뵙게 되었다. 말씀을 듣기 전 책상에 놓인 작품집을 먼저 펼쳐 보았다. 화선지뿐만 아니라 폐목선의 수기목, 도자기, 인재석 등 창의적인 소재에 본인의 마음에 담아 온 글귀들이 다양한 서체로 적혀 있었다. 그중 盡人事待天命(진인사대천명)을 좌우명으로 삼고 있다고 했다. 자기 할 바를 다하고서 하늘의 명을 기다린다는 뜻으로 가죽나무에 서각해 금니(金泥)를 입힌 글은 한 눈에 보아도 단아했다.

김석호 씨가 서예에 입문하게 된 동기는 초등학교 때 부친에게서 받은 붓 한 자루였다.

“그때는 그 붓 한 자루가 제 인생을 바꾸게 될 줄 몰랐습니다.”

■ “삼성 취업도 포기했죠”

글씨를 쓰는 초정 김석호 서예가. 그는 젊은 날 묵향과 평생 함께하기로 결단한 뒤 한 길을 걷고 있다.
그 인연으로 학교 습자부에 들어가 이른 나이에 붓을 쥐었다. 붓을 먹물에 찍어 수없이 반복해서 획을 긋는 일이 지루할 만도 한데 오히려 그 시간이 즐거웠다고 한다.

그는 한지 생산지인 경남 의령에서 태어나 고등학교 때 부산으로 이사를 왔다. “담임선생님이 너는 부산에 가서 열흘도 안 돼 다시 올라올 거라고 장담을 했어요. 그때는 성격이 워낙 내성적이고 부끄러움을 많이 타 대도시에 가서 적응을 못 할 거라고 생각하셨나 봅니다.”

그러나 자신이 고요하고 정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고 한다. 자신도 몰랐던 활달한 기질을 발견하고 자연스럽게 그는 움직이고 행동하는 청소년기를 보냈다. “고등학교 미술 특활 시간에 다른 친구들은 대부분 수채화를 했어요. 그런데 저는 자연스레 묵화를 하게 되더라고요.”

서예로 각종 대회에 출전하여 상을 받으면서도 그는 대학 진학을 전기공학과로 하게 됐다. 부친께서 장래를 위해 적극적으로 권유해서였다. 그때 서예 동아리 활동을 했는데 지도해준 분이 우석 김봉근 선생이었다. 그분에게 처음으로 정식 지도를 받았다. “대학 졸업 무렵 전기 공부를 더 해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전문대에 자리를 잡으면 서예를 할 시간이 더 많지 않을까 해서였어요. 대학원에 진학해 실험실 행정 조교를 하며 일주일에 토·일요일만 집에 가고 나머지는 학교에서 먹고 자고 했어요.”

전기공학 석사과정을 수료하고 조교 생활에 강의까지 이어가는 바쁜 와중에도 붓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고 지도교수가 글씨 그만 쓰고 학과 공부에 전념하라고 충고했다고 한다. 그가 전기공학도의 길을 포기하고 서예인의 길을 선택하게 된 과정도 극적이었다. “수원에 있는 삼성전관에 원서를 썼는데 합격이 됐어요. 결단을 내려야 했는데 도저히 서예를 포기하지 못하겠더라고요.”

그 길로 잠적해 부산 북구 덕천동 로터리에 서예학원을 차렸다. 3년 뒤 학과 지도 교수가 일본 연수를 떠나며 그 자리를 그에게 맡기려 했는데 연락이 닿지 않아 다른 친구가 그 자리에 가게 되었다고 한다.

“학교에 계속 남아 있었다면 줄곧 교직에 몸담고 있었을 텐데, 대기업 취직 자리도 마다하고 안정된 자리를 뿌리쳤으니 집사람과 처갓집 식구들이 실망을 많이 했지요. 특히 지도교수님이 매우 안타까워하셨어요. 많이 아껴주셨는데.”

그 선택에 후회가 없다고 한다.

■ “1년 지나면 이야기합시다”

‘서예 인생’을 들려주는 초정 김석호 씨.
“서예를 시작해 1년 넘어가면 중독처럼 붓을 잘 안 놓습니다. 그 매력을 어느 정도 알게 되어 붓을 놓더라도 언젠가는 다시 붓을 잡습니다. 하지만 5, 6개월 하다 그만두면 어렵다는 생각만 갖게 돼 두 번 다시 붓을 안 잡아요.”

그 당시 수강생들이 찾아와 얼마 정도 하면 글을 좀 쓸 수 있느냐고 물으면 그는 늘 이렇게 대답한다고 한다.

“1년 후에 이야기합시다.”

그는 태생적으로 지닌 열정으로 1983년 대한민국미술대전에 입선한 이후 부산미술대전 초대 작가로, 2003년 대한민국미술대전 초대 작가로 실력을 인정받으며 활동 영역을 넓혀갔다. 학원생들 가르치면서도 빈번히 서울을 드나들었다. 인사동 거리를 쫓아다니면서 먹 사고 붓 사서 짊어지고 저녁차 타고 부산에 오길 3년. 그 시간이 몸으로 체득하면서 쌓아온 서예에 대한 이론을 정립하는 샘물 같은 시간이었다.

서울에서 여초 김응현 선생께 사사를 받았는데 그분한테서 필법 중에 중봉(中鋒)의 중요함을 배우고 깨우쳐 좀 더 깊은 서예의 세계에 다가가게 되었다. 중봉은 선을 그을 때 붓끝이 획의 중간을 지나가는 것을 말한다고 한다.

“중봉은 정확한 절(折·꺾을 절)에 의해서만 이루어집니다. 정확한 절을 하지 않고는 중봉이 될 수 없어요.” 중봉은 불교의 중도 사상, 유가의 중용사상과 같다고 했다. 붓놀림 속에 이렇게 심오한 길이 있다 하니 다음 이야기에 귀가 기울여졌다.

그는 평소 금석문(金石文)에 관심이 많았다. 금석문은 청동기나 석비 등에 새겨진 명문을 뜻하며, 거슬러 올라가면 서예의 뿌리와 정신을 알 수 있는, 문학의 고전과 같은 글자였다. 기교가 섞이지 않은 금석문을 보고 정직하게 공부해야 제대로 된 자기 필체를 펼칠 수 있다고 느꼈다. 서예를 배워나가는 과정에서 그는 자신이 써 내려가는 한 획, 한 글자가 일상생활은 물론 자연과 인간, 우주와 연관되어 있음을 느끼고 중봉의 정신에 더 몰입해 들어갔다. 실제 그 근원에 가 닿는 글자를 경험해 보고자 기(氣) 수련 수업을 받았다고 한다.

“가부좌 틀고 삼일 만에 온몸이 진동하는 기의 흐름을 경험했어요.”

온갖 잡념을 버리고 정신을 한곳에 두어야 이런 현상이 온다고 했다. 그때 사범이 계속 잡으세요! 라고 소리를 질렀고 ‘뜬다’ 라는 생각을 하는 순간 가라앉아 버렸다고 한다. 그런 경험을 하고 나니 붓을 잡는 정신 자세가 달라졌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이후 어깨에 힘을 빼는 데 수십 년이 걸렸다는 것이다. 그는 평소 생활에서도 중봉과 중용의 의미를 접목하려고 노력했다. 그 과정은 화선지 위에서뿐만 아니라 일상생활로 이어졌다.

■ 화합과 조화, 제 몸 낮추기

“서예를 서도라고 하는 이유는 서예가 단순히 글씨를 아름답게 쓰는 행위만이 아니라 생활에서 선을 실천하는 수행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생활 선(禪)에서 기는 별난 것이 아니라 그냥 공기에요. 공기는 형상은 없지만 사람 기운에 따라 선한 공기도 되고 나쁜 공기가 되기도 합니다. 서로 다투게 되면 악한 기운을 주고받고 좋은 대화를 나누면 선한 기운을 주고받게 됩니다.” 사소한 것 같아도 일상생활에서 기의 흐름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라고 했다.

중봉을 향해 들어가다 보니 결국 그는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그가 찾은 중봉의 세계는 화합과 조화였다.

“그 세계는 제 몸을 낮추고 움직여야만 찾아지더라고요.”

그는 현재 부산서예비엔날레에서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이 단체를 만든 농재 박후상 서예가가 타계하면서 그 뒤를 잇게 된 것이다. 오는 12월에 열리는 부산서예비엔날레를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그 행사는 한국은 물론 중국 일본 미국 호주 등 20여 개 나라의 서예인이 참여하는 대규모다. 그 행사가 화합과 조화의 장이 되길 바라는 인사를 미리 전한다고 말씀드렸다. 몸과 마음에 묵향이 스며드는 것을 느끼며 자리를 마쳤다.

시민기자·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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