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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마을' 혁신을 찾아서 <46> 사천 은사마을

수많은 유학자 배출한 선비마을…농촌체험마을 꿈꾼다

  • 이완용 기자 wylee@kookje.co.kr
  •  |   입력 : 2022-01-23 19:30:44
  •  |   본지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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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대 말 전기 들어온 오지
- ‘범죄 없는 마을’로 선정되기도

- 조선 세종·단종 태실지 유적
- 학문 닦던 성성대·사집봉 등
- 곳곳에 선비 흔적 서려 있어
- 주민 교양강좌·작은 음악회
- 마을박물관 건립 등 계획 중

중국 당나라의 시인 유우석(劉禹錫: 772~842)은 누실명(陋室銘)이라는 글에서 ‘산이 높아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신선이 살면 명산이고, 물이 깊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용이 살면 신령스러운 물이다’고 했다. 명산이나 이름난 물은 높이나 깊이 때문이 아니라 거기에 서려 있는 기운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그는 ‘사는 집이 누추할지라도 그곳에 사는 사람의 덕이 향기로우면 집도 따라 향기롭다’며 ‘담소를 나눌 선비가 있고 소박한 거문고를 연주하거나 성인의 경전을 읽을 수 있을 정도의 집이라면 어찌 누추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사람이 사는 마을도 마찬가지다. 마을 주변에는 아직도 선비의 그림자와 학문의 체취가 전해지고 있으며, 350여 년간 일가가 터전을 이루고 살면서도 다툼이나 소란스러움 없이 지내고 있다면 비록 지금은 몇 가구가 살지 않더라도 어찌 명품마을이라 하지 않을 수 있을까.
마을의 사랑방 역할을 하고 있는 정자 가은정.
■현대화가 늦은 사천의 오지

경남 사천시 곤명면 은사(隱士)마을은 벼슬에 나아가기를 싫어한 선비가 은둔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남해고속도로 곤양IC에서 곤명면 소재지를 지나 옥종면 유황온천탕 방향으로 4㎞를 더 올라가면 나온다. 세종 20년(1438년) 문과에 급제해 경북 영천군수를 지낸 이삼(李森) 공이 영천시에 터를 잡았는데 후손이 병자호란을 피해 진주를 거쳐 이곳에 터를 잡은 것이 마을 역사다. 평창 이 씨가 대부분이지만 강 씨, 정 씨, 김 씨, 하 씨도 몇 가구 있다.

마을은 정자관 형상의 군자봉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20여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있고 하천을 마주하고 반대쪽의 유청산 아래에도 10여 채가 있다. 윗마을 정골마을에도 10가구가 있다. 1960, 70년대까지만 해도 100여 가구가 살았으나 이제는 다른 농촌 마을처럼 절반 이하로 줄었다. 전기가 1970년대 말에 들어왔고, 지표수를 식수로 사용하다 상수도가 최근에야 설치됐을 정도로 오지마을이다. 주민도 10여 년 전까지는 논농사와 밭농사가 전부였으나 귀농하는 자녀가 생기면서 딸기 농사를 짓는 주민이 5가구다.

■곳곳에 선비의 흔적

마을 앞에 서 있는 은사마을 선비상.
이런 마을에 학문을 했던 선비의 흔적도 다양하다. 가장 유명한 유물은 세종대왕태실지(경상남도 기념물 제30호)와 단종 태실지(경상남도 기념물 제31호)다. 조선 시대에는 태를 사람 신체의 근원으로 여겼는데, 왕실에서는 태실도감을 두고 전국의 길지를 찾다가 여기를 태실로 정했다. 나중에 세종은 단종의 태실을 자신의 태가 있는 인근에 자리를 잡게 했다니 명당 중의 명당이라는 찬사를 듣는다. 태실은 나중에 경기 고양시의 서삼릉으로 옮겼다.

태실지에서 북서쪽 200여m 상류 하천가에는 주민이 용(龍)바위라고도 한 고반대(考槃臺)가 있다. 시경(詩經)의 고반재간 석인지관(考槃在澗 碩人之寬. 시냇가에 머물 만한 터가 있으니 은거하는 석인(선비)의 마음이 넉넉하다)에서 따 온 고반대는 조선 중종 때 곤양군수 관포 어득강이 태실지를 봉심(奉審)한 뒤 향토의 유림과 시를 읊고 담론했던 곳이다. 한때 인근 주민은 고반계를 결사해 춘추로 경전을 공부하거나 시를 짓고 자연을 즐겼는데, 최근에는 사천향교 한시 동호회원 20여 명이 시를 지으며 선현의 유적을 더듬었다.

■학풍을 잇는 유학자 배출

경상남도 기념물 제31호인 단종 태실지.
마을을 마주하는 유청산(儒廳山) 정상에는 수십 t의 바위를 인위적으로 쌓은 듯한 성성대(省省臺)가 있다. 50명이 한자리에 앉을 수 있을 정도로 넓은데, 원근의 학자들이 수시로 시회와 담론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마을 앞에는 선비가 모여 공부했다는 사집봉(士集峰)과 지식곡(知識谷)이 있는데 사집봉 중턱에는 1830년께 조선왕실의 돈녕부에서 도정을 지낸 이존수(李存洙) 공이 만락정(晩樂亭)을 세우고 후학을 가르치며 학문을 이어갔던 흔적이 있다.

고인이 되었지만 이 마을 출신 이현수 전 국회의원의 장인인 윤길중 전 국회부의장은 마을을 방문했다가 ‘무릉도원이 따로 없다’며 ‘은사동 도원곡’이라는 휘호를 돌에 새겼다. 독립지사인 유암 이후림 선생은 간재 전우 선생과 송산 권재규 선생에게서 수학한 뒤 태봉산 아래에 은구재와 이이당을 짓고 후학을 가르쳤다. 제헌 국회의원을 지낸 강달수, 경남도(부산과 울산 포함)의회 의장을 역임한 이정한 등 100여 명의 인재를 배출했다. 정재 김정호, 황남 문영빈, 추연 권용현, 월헌 이보림, 의재 허백련, 효당 최범술, 유당 정현복 등 수많은 문사와 교유하며 나라의 장래를 걱정했다.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 시도

선비가 출사를 거부하고 은둔하며 지낸다고 하여 붙여진 은사(隱士)마을 전경. 인적은 드물지만 마을 곳곳에는 선비의 흔적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현대화된 이 마을에 전통의 모습이 곳곳에 남아 있다. 마을 입구에는 가은정이라는 정자가 있는데, 평소에는 주민의 쉼터 역할을 하지만, 마을 회의를 하거나 집안에 경사가 생기면 음식을 가져와 잔치를 벌인다. 집안의 애경사는 거의 이곳에서 나누고 덜어준다. 설날이면 마을회관에서 도포와 유건을 갖춰 항렬에 따라 세배하고 덕담을 나눈다. 범죄 없는 마을에 선정되기도 했고, 사천시로부터 ‘선비마을’로 지정돼 받은 사업비로 마을안내판을 세우고 높이 2m의 선비상을 건립했다. 앞으로는 한학자를 초청해 주민을 대상으로 교양강좌를 갖거나 음악가의 재능기부로 작은 음악회를 개최할 계획이다. 마을박물관을 건립하거나 조상이 공부했던 서적을 한자리에 모아 전시할 계획도 있고, 마을에 산재한 유적지를 기반으로 딸기농장을 접목해 체험마을을 만들자는 소리도 커지고 있다.

노인회장 이재극(82) 씨는 “전통의 흔적이 남아 있고, 보존하겠다고 생각하는 주민이 많아 다행이다”며 “도시에 있는 자녀가 모이는 명절이나 휴가철에 예절교육이나 교양강좌로 미풍양속을 지켜가는 마을을 만들겠다”고 말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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