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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공작소-피란수도 부산…1023일간의 이야기 <4> 피란수도가 부산에 남긴 것

식민 흔적 지워버린 전쟁… 그 폐허 위 경제·문화 부흥의 싹 틔우다

  • 나여경 소설가
  •  |   입력 : 2022-04-12 19:46:18
  •  |   본지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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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형적 일본식 도시였던 부산
- 6·25 뒤 ‘이민자 도시’로 변화

- 예술인 몰리며 문화수도 발돋움
- 지역 특유 독자성·자의식 형성
- 이승만 정권 모순 목격하면서
- 독재에 맞서는 정치의식 키워

- 밀면·돼지국밥 등 음식도 탄생

1023일간 피란수도 시절은 ‘현대 부산’을 만들었다. 부산을 만든 세 가지 역사적 계기는 임진왜란, 1876년 개항, 한국전쟁이다. 임진왜란이 통제와 교류의 국경 왜관 도시인 ‘근세 부산’을 만들었다면, 1876년 개항은 식민도시로 향하는 ‘근대 부산’을, 한국전쟁(피란수도 시절)은 오늘의 ‘현대 부산’을 만들었다. 전쟁을 통해 현대 부산이 만들어졌다는 것은 현대 부산이 ‘파괴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무엇을 파괴했는가 하면 식민도시 부산을 철저히 파괴했다. 그런 파괴의 카오스적 질서 속에서 현대 부산이 만들어졌다. 일제강점기 부산은 일본식 도시였다. 전통 인문도시 동래는 파괴됐고, 그 옆에 신흥 유흥도시 온천장이 만들어졌으며, 지금의 원도심인 부산부는 ‘나가사키현 부산’으로 불릴 정도로 전형적인 일본식 도시였다.
1023 이야기 계단길에 있는 피란 떠나는 가족 동상. 한국전쟁 기간 피란민의 유입으로 부산의 인구가 급증하자 주거 공간 부족 문제가 심각했다. 피란민은 빈터만 있으면 판잣집을 지었고, 무덤 위에라도 살 집을 꾸렸다.
■ ‘파괴적’으로 형성된 도시

일본식 식민도시 색채를 벗기 시작한 것은 1945년 해방 때부터였으나, 그것이 본격화한 것은 한국전쟁 때였다. 일본은 패망 직전 오늘날 국제시장 지역인 서정(西町)의 민가를 모두 불태웠다.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 그 공터에 없는 것 빼고 다 있다는 피란민의 국제시장이 들어섰다. 일제의 신사가 있던 용두산 비탈에는 게딱지 붙듯 피란민의 판잣집촌이 들어섰으며, 아미동의 일본인 공동묘지는 사람 사는 마을로 변했다. 북새통을 이룬 피란민 마을에서 번진 불길은 일제강점기 부산을 대표하던 르네상스풍의 옛 부산역 건물을 삼켜버렸다. 피란민의 도시는 좋은 것 나쁜 것 가릴 것 없이 카오스적으로 36년 묵은, 개항 이후로 치면 70여 년 식민도시의 색채를 벗어나고 있었다. 그 위에 새로운 부산, 현대 부산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두 가지 핵심 양상을 말하면 첫째, 대단위 인구 유입이었다. 부산 인구는 일제가 물러간 1945년 28만 명에서 한국전쟁 이후 100만 명으로 급증했다. 해방 이후 10년 만에 인구가 거의 4배로 늘었다. 일본의 식민도시에서 내국 이민자의 도시가 된 부산은 한국 사회에서 가장 개방적이고 다양한 문화를 지닌 도시가 되었다. 둘째, 경제의 경부 축이 굳게 뿌리를 내리면서 부산이 한국 제2 도시로 자리 잡는다. 일제강점기 경제의 경부 축은 해방 이후 경인 축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전쟁 이후 다시 경부 축이 강하게 자리 잡으면서 부산은 명실상부한 제2 도시가 된다. 한국경제에서 부산이 차지하는 무역 비율은 해방 이후 5%까지 추락했으나, 1951~1953년 다시 85% 안팎을 기록했다. 1970년대 후반까지 부산 경제는 계속 팽창, 신장했다. 하지만 이제는 명목상의 제2 도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1990년대 이후 경인 축이 한국경제의 주축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 ‘문화수도’라는 값진 체험

임시수도기념관 전시관에 피란수도 시절 밀면 가게를 꾸며 놓은 공간이(사진) 있다. 밀면의 기원에 관한 얘기 가운데 한국전쟁 때 부산으로 온 피란민에 의해 탄생한 음식이라는 설이 가장 설득력 있다.
피란수도 시절 부산은 문화예술의 수도였다. 당시 문화의 거점은 광복동 일대였고, 부산은 다방의 도시였다. 1952년 말 100곳을 헤아리던 다방은 밀다원(密茶苑) 금강(金剛) 춘추(春秋) 녹원(綠園) 청구(靑丘) 스타 르네상스 야자수 등 모종의 바람이 깃든 이름으로 전쟁의 불안과 허무를 달래던 문화공간이었다.

문화예술 관점에서 피란수도 시절은 전쟁통에 후다닥 지나간 ‘임시’, ‘단절’의 시기가 아니라 기원과 연속의 시기였다. 1950년대 이후 한국문학의 원형질이 새롭게 마련되었고, 부산문화의 독자적인 강한 자의식이 마련되었다.

첫째, 1953년 환도로 끝난 것이 아니라 전란 중에 새로운 것이 형성됐다. 1952년 부산에서 월남 문인들 중심으로 창간한 ‘주간문학예술’은 이호철 신경림 허만하 등이 등단한 ‘문학예술’로 이어졌고, ‘문학예술’은 이후 ‘사상계’로 흡수·통합되는 출발점이 되기도 했다. 1954년 창간한 ‘현대문학’은 향후 한국문학의 한 축을 이뤘는데 피란수도 부산의 문학장에서 서울 피란작가와 지역작가의 교류에 의한 유산이었다. 이 잡지의 초창기에 혁혁한 역할을 한 작가가 언양 출신으로 피란시절 부산에 와 있던 오영수였다.

둘째, 역사적으로 부산에서 지역 문화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됐다. 그 근저에는 피란수도 시절 형성된 지역문화의 강한 자의식이 자리 잡고 있다. 문학판에서 “지금까지는 서울 있는 놈들이 문단을 선도해 왔지만, 지금부터는 부산이 수도로 됐으니까 재부(在釜) 문인들이 문단의 주도권을 잡아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고 김동리의 소설 ‘밀다원 시대’는 적고 있다. 김동리 소설에서는 ‘전필업’이란 인물로 나오는데 실제 부산의 모더니즘 시인 조향이 “이제는 부산이 수도다. 부산이 중앙문단이고 서울의 너희들은 피란민이다”는 말을 하고 다녔다고 한다.

부산 화가들은 1953년 지역적 정체성과 미술 이념을 분명히 하고자 토벽회를 창립했다. 부산 미술 초창기를 개척한 김경 임호 서성찬 김영교 김종식 김윤민이 지역 색채를 고수하기 위해 결성했다.

피란시절의 이런 문화적 의식은 이후 꾸준히 이어졌다. 특히 1980년대에 지역 문화운동이 분출했을 때 문학에서는 무크지 ‘지평’, ‘전망’ 등이 지역 문학의 독자성을 기치로 내걸었고, 미술에서는 민중미술과는 다른 부산의 독자적인 형상 미술 흐름이 형성되기도 했다. 제2 도시의 강한 문화적 자의식, 그것의 뿌리는 피란수도 문화에 있었다.

■ 치열한 정치적 경험의 장

피란수도 시절 부산은 가장 치열한 정치적 경험의 장이었다. 인민군 ‘미점령 지역’으로 민간인 학살(부산·경남 3만여 명)이 숱하게 자행된 곳이며, 임시수도 시절 이승만 정권의 모순이 적나라하게 목격된 곳이다.

1951년 국민방위군 사건은 1·4후퇴 당시 국민방위군 예산 25억 원 상당을 그 간부들이 부정 착복해 방위군 최대 8만 명이 사망하고 20만 명이 동상에 걸린 희대의 사건이었다. 1952년 부산 정치파동은 이승만 대통령이 독재정권의 기반을 굳히기 위해 피란수도 부산에서 폭력을 동원하여 강제로 국회의원을 연행, 구속하면서 발췌개헌안을 밀어붙인 정치적 파행이었다. 1952년 정치파동 직전에는 충무동 광장에서 이승만 대통령 암살 미수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일련의 정치 경험은 그냥 사라지는 게 아니었다. 부산 사람의 정치적 의식으로 내면화됐다. 부산은 독재에 저항하는 도시로, 1960년 4월혁명과 1979년 부마민주항쟁에서 보듯 장차 한국 민주화에 큰 발자국을 남기는 도시가 되었다.

■ 밀면, 돼지국밥, 부산어묵

피란수도 시절 ‘부산표 음식’도 만들어졌다. 부산 밀면은 이북 피란민이 구호식품으로 나온 밀가루를 냉면 대용으로 빚어 만든 음식이었고, 부산돼지국밥은 밀양 이북 등 각지에서 밀려든 피란민이 후다닥 말아서 만든 국밥으로 ‘식객’의 허영만은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반항아 같은 맛”이라고 했다. 어묵도 그 뿌리는 일제강점기에 있지만, 그것이 ‘부산 어묵’으로 거듭나게 된 것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였다. 손질한 다음 버리는 생선 대가리와 내장 등을 밀가루 반죽과 섞어 거친 기름으로 튀겨내던 것이 덴뿌라였으며 부산어묵의 시작이었다.

참 먹을 게 없던 시절이었다. 피란수도 부산은 한국의 사회복지가 태어난 산실 역할도 톡톡히 했다. 부산이 한국 사회복지 역사의 중심 무대였다. 전쟁의 최후방이던 부산을 통해 각종 구호물자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고아는 총 10만 명을 헤아렸는데 그중 3만 명이 부산에 몰려들었다.

피란수도 부산에서 사회복지 시설을 설립·운영하던 1세대 원장들의 99%는 이북 출신이었다. 전쟁 와중에 이북에서 월남하였던 피란민이 사회복지의 주축을 이뤘다. 기독교인이 많았다. 한국전쟁 때 구호하기 위해 내한한 외원기관이 대부분 기독교적 색채를 띠면서 기독교적 성향을 강조하였다. 그래서 당시 고아원을 운영하던 스님이 원조를 얻기 위해 머리를 기르고 개종하는 웃지 못할 경우도 있었다. 사회사업가를 케이스워커(caseworker)라고 불렀는데 초기에는 뜻도 모르고 ‘상자 만드는 사람’으로 오해했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사회복지와 관련해서는 부산의 일신기독병원으로 이어진 호주 선교사 매켄지 집안을 비롯해 숱한 얘기가 남아 있다. 한국 의료보험제도 씨앗을 뿌린 장기려 박사의 청십자의료보험조합도 피란의 땅 부산이 품었던 찬란한 사회복지의 사례다.

※공동기획 : 부산광역시 서구·국제신문·(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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