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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5년 당시 서구(현 사하구) 장림동 일대 항공사진. 왼쪽 사진 속 초록색 선은 당시 영화숙의 대표 번지(장림동 121·현 신평동 569-34)를 나타낸다. 1980년대 쓰레기로 땅이 매립되기 전 이곳 일대는 부산의 외곽 지역으로, 논밭과 갈대 습지가 가득했다. 사진제공=부산시, 부산 사하구 |
“족히 수백 명은 살았는데 연탄은 30장밖에 주문하지 않아 의아했죠. 대여섯 명이 일주일 쓸 양도 안 되거든요. 사무실에서 일하는 관리자들만 난방을 하고, 저 어린아이들은 얼음장 위에서 자는가 보다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산 전역의 부랑아를 잡아다 집어넣은 시설이 영화숙 아닙니까. 그 시절 부랑아를 다루는 방식이 얼마나 가혹했겠어요.”
최영만(66·사진) 씨가 기억하는 1960년대 부산 최대 부랑인 시설 영화숙의 모습이다. 그는 사하구 신평동에서만 50년 이상 살았다. 그런 최 씨는 “당시 신평·장림에서 살았던 사람이라면 영화숙을 모를 수 없다”고 설명했다. 산비탈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까까머리 어린이들이 밭일하는 광경을 쉽게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부산역 등 각지에서 ‘소탕’된 부랑아가 이곳에 갇혀 있다는 건 물론, 저들이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으며 산다는 사실 역시 충분히 짐작됐다. “다들 못 먹고 사는 시절인데 부랑아들이 모인 시설에서야 오죽했겠나”는 거다.
그는 영화숙이 주문한 연탄을 배달하며 몇 차례 시설을 둘러보기도 했다. 친구가 ‘영화숙에 들어가기 무섭다’며 부탁해온 통에 하는 수 없이 일을 맡았다. “우중충한 시멘트벽으로 된, 그리 크지도 않은 건물이었다. 여기가 수백 명이 사는 곳 맞나 싶었다. 주문하는 연탄도 적어서 어떻게 생활하는 건지 궁금했다”고 한다. ‘내 아이가 이곳에 갇혀 있다’며 도움을 청하는 외지 사람도 적지 않았다. 동네 사람들과 함께 영화숙에 찾아가 연고를 확인해주면 마지못해 아이를 풀어줬다.
당시 동네 아이들에게 영화숙은 ‘귀신의 집’과 마찬가지였다. 신평동에서 10대를 보낸 김남주(가명·여·62) 씨는 “그 시절엔 주로 갈대밭을 뛰어다니며 놀았다. 해가 지면 집집이 엄마들이 나와 아이를 데려가는데, 우리 엄마는 ‘자꾸 돌아다니면 ‘영화소’(영화숙)에서 잡아간다’고 겁줬다”고 기억했다. 저곳에 한 번 잡혀 들어가면 절대 나오지 못하고, 도망이라도 갔다가 잡히면 맞아 죽는다는 소문도 아이들 사이에서 떠돌았다.
영화숙 아이들은 밭일 외에도 갖가지 노역에 동원됐다. 고된 생활과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 도망쳐 나온 아이들은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신평동 토박이 오형자(여·67) 씨는 “내가 11살 무렵이다. 바닷물이 밀려오니까 영화숙 아이들을 시켜 돌담으로 둑을 쌓는 걸 봤다. 삽에다 끈을 묶어서 한 사람은 땅을 파고 두 사람은 끈을 당기는 식이었다. 울타리를 치거나, 갈대를 뽑아 빗자루를 만들기도 했다”며 “도망쳐 나온 아이들이 살려달라, 숨겨달라고 부탁한 적도 있다. 이 아이들 하는 말이, 도망치다 잡히면 죽는다고 했다. 영화숙 출신의 남편 없는 여자가 아이와 함께 우리 마을에 정착해 사람들의 눈총을 받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20대에 장림시장에서 옷 가게를 운영한 김태영(가명·여·60대) 씨는 “임신한 여성을 비롯해 허름한 옷차림의 아이들이 담벼락 근처 햇볕 드는 곳에 쪼르르 앉아 있는 모습이 떠오른다. 겨울바람을 그런 식으로 버텨내고 있었던 거다. 주변에는 관리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어슬렁거렸는데, 손에 몽둥이 또는 방망이로 보이는 걸 꼭 쥐고 있었다. 부모 없는 아이들일 텐데, 참 너무하다는 생각을 지우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보건복지부 보건사회통계연보를 보면, 영화숙의 당시 대표 지번은 ‘부산 서구 장림동 121’로 확인된다. 오늘날 ‘부산 사하구 신평동 569-34’와 그 주변부에 해당한다. 배고개~구평고개에 깔린 야트막한 비탈로, 현재는 공장과 상업 시설, 아파트가 자리한다. 1980년대 신평동 일대에 공단이 들어서기 전까지는 논밭과 갈대 습지로 채워진 공간이다. 1960년대 이곳 주민은 고개 비탈에 올라 영화숙과 재생원에서 생활하는 ‘부랑인’을 직접 지켜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