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숙·재생원’은 부랑아 선도를 명분으로 마구잡이 단속을 일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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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제신문(당시 국제신보) 1970년 6월 24일 자에 보도됐던 영화숙의 소년 감금 실태. |
1968년 부산 서부경찰서는 재생원 측이 아들의 죽음을 돈으로 무마하려 했다는 어머니 정정순(38) 씨의 고소를 접수했다. 1966년 6월 22일 오전 11시30분 정 씨의 장남 박부철(15) 군은 어머니 가게로 놀러 가던 중 재생원의 ‘불량배잡이’에 걸려 강제수용 당했다. 박 군은 이틀 뒤인 그달 24일 익사했다.
이 소식을 들은 정 씨는 재생원을 찾아가 항의했다. 이 원장은 사건 발생 9개월 뒤 위자료 조로 10만 원을 줬다. 당시 정 씨는 “재생원은 세계봉사회에서 보내주는 양육비를 실제 인원수보다 많이 횡령했다가 감사에 걸릴 것이 두려워 부모 있는 소년들까지 강제수용시켰다”고 주장했다.
1970년에는 당시 13살의 이성규 군이 영도경찰서를 찾아가 “친구들을 구해달라”고 호소했다. 경남 남해군 창선면의 국민학생이던 그는 그해 5월 30일 한말주(16) 탁군옥(15) 군과 배편으로 부산 구경을 왔다. 이틀 뒤 자갈치에서 남해행 배를 기다리던 중 20세 남짓한 청년들에게 붙잡혀 영화숙으로 끌려갔다.
20일 만에 영화숙을 탈출한 이 군은 “부산시 사회과 직원이 찾아와 연고자가 있는 소년들에게 손을 들게 했을 때 200여 명 중 약 100명이 손 들었으나 직원이 떠난 다음 소대장이 손 든 소년들을 몽둥이로 때렸다”고 증언했다.
동아대 남찬섭(사회복지학과) 교수는 “당시 부산시 사회과는 공무원에게 골치 아픈 부서로, 최대한 빨리 떠나고 싶은 자리 중 하나였다. 시설의 실태를 알더라도 넘어가려는 경향이 강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