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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철의 낱말로 푸는 인문생태학]<592> 벌레와 범려 ; 버러지같은 인물

  • 박기철 경성대 광고홍보학과 교수
  •  |   입력 : 2022-11-28 19:30:27
  •  |   본지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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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입수능이나 국민상식 문제로 나올 법하다. 다음 중 네 개의 낱말과 다른 하나의 낱말은? 정답은 차근차근 밝히도록 하겠다. ①벌레 ②충(蟲) ③버그(bug) ④웜(worm) ⑤곤충. 벌레는 한자로 충(蟲)이다. 한자에서 벌레를 뜻하는 부수로 쓰일 때는 줄여서 虫이라고 쓴다. 애벌레 모양을 그린 상형문자다. 虫이 들어간 한자는 다 벌레다. 모기 문(蚊) 파리 승(蠅) 나비 접(蝶) 벌 봉(蜂) 개미 의(蟻) 거미 주(蛛) 지네 공(蚣) 등등등….

곤충에 속하는 옴벌레 蠡와 인생 롤모델 범려.
그런데 고등한 척추동물로 양서류인 개구리 와(蛙)나 파충류인 뱀 사(蛇)도 벌레로 여겨 虫이 들어 있다. 동물성 플랑크톤으로 단세포 원생생물인 짚신벌레도 벌레로 여겨서 짚신벌레다. 짚신처럼 보이는 벌레다. 파리의 애벌레인 구더기 저(蛆)도 영락없이 벌레다. 환형동물에 속하는 지렁이 인(蚓)이나 거머리 질(蛭)에도 여지없이 벌레 충이 들어 있으니 벌레다. 선형동물인 회충(蛔蟲)이나 요충(蟯蟲)은 물론 편충(蟲) 십이지장충(蟲)도 벌레다. 편평한 납작벌레인 편형동물이나 바퀴처럼 생긴 윤형동물도 벌레다. 결국 벌레는 광범위한 낱말이다. 인간보다 못한 하등한 동물은 웬만하면 대충 벌레라 부르는 편이다. 벌레에 해당하는 영어 낱말은 bug다. 컴퓨터가 잘 작동되지 않으면 안에 아주 작은 벌레가 들어 있다고 여겨 버그라 부른다. 한국화된 댄스인 지르박의 어원인 지터벅(Jitter Bug)은 덜덜 떠는 벌레처럼 추는 요란한 춤이다. 컴퓨터 작동을 방해하는 기계 전기 전자적 시스템 결함이나 프로그램화 코딩 과정에서 일어나는 자체적 오류이자 에러를 말할 때도 버그라 한다. 불순한 누군가의 장난으로 인해 잘못 들어온 외부적 버그는 특별히 바이러스라 부른다. bug랑 비슷한 낱말로 worm이 있다. 흙 속에서 꼼지락거리는 벌레라 하여 지렁이를 땅벌레인 어스웜(earthworm)이라 하는 이유다.

아까 낸 5지선다형 문제에서 벌레는 한자로 蟲이며 영어로 bug나 worm이다. 즉 벌레=蟲= bug=worm 등식이 대강 성립된다. 그러니 정답은 ⑤곤충이다. 척추동물이라는 넓은 낱말 안에 포유류, 즉 포유강에 속한 사람이 있듯이(척추동물>사람) 벌레들 중에서 절지동물이라는 넓은 낱말 안에 곤충류, 즉 곤충강이 있다. 척삭동물이라는 큰 문(門) 안에 척추동물이라는 아문(亞門)이 있고 이 안에 원구류 어류 양서류 파충류 조류 포유류가 있듯이 절지동물이라는 큰 문(門) 안에 개미 등의 곤충류, 거미 등의 거미류, 지네 등의 다지류, 새우 등의 갑각류가 있다. 개미는 곤충이지만 거미나 지네를 곤충이라 하면 틀렸다. 개구리나 뱀을 포유류라고 하는 꼴이다. 개미 거미 지네는 몸 구조가 다른 벌레다.

벌레가 들어간 한자를 사람 이름으로 쓰려고 할까? 거의 누구도 그리하지 않는다. 그런데 조선 초기 깐깐한 선비였던 정여창(1450~1504)은 자신의 호를 일두(一蠧)라 했다. 한 마리 좀벌레라니! 중국인들이 인생 롤모델로 삼는다는 범려(BC 536~448)는 이름이 려(蠡)다. 한 마리 옴벌레라니! 두(蠧)처럼 려(蠡)라는 한자에도 벌레가 두 마리나 있다. 작은 벌레인 버러지다. 버러지만도 못한 놈이라지만. 범려는 인류역사상 가장 최고로 성공한 인물로 역사에 남았다. 이름답게 벌레처럼 살아서일까? 역설적으로 멋진 벌레다. 벌레처럼 범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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