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는 좋게 말해서 융통적 글자이며 안 좋게 말해서 모호한 글자다. 어떤 한자가 가진 뜻은 전혀 반대의 뜻이 되기도 한다. 쉬운 예로 子(자)가 그렇다. 어린아이인 子가 높은 스승을 뜻하기도 한다. 자가 붙은 인물은 엄청난 성인이다. 공자 맹자 노자 장자 열자 순자 한비자 한자 묵자 손자 관자 주자 등…. 내 머릿속을 아무리 샅샅이 뒤져도 열 명 남짓이다. 박 씨인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박자(朴子)가 될 수 없다. 그런데 짧은 말씀만으로 위대한 자급(子級) 반열에 오른 인물이 있으니 고불해(告不害 BC 420~350)다. 고자(告子)로 불린다. 성적 불구인 고자(鼓子)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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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선과 성악 그리고 이기와 이타 사이 |
도대체 고자는 무슨 말을 했길래 높은 스승인 자급 성인으로 등극했을까? 고자의 발언은 ‘맹자’에 기록되어 있다. 고자 왈(曰), 사람의 본성은 물과 같아서 물길이 동쪽이면 동쪽으로 흐르고 물길이 서쪽이면 서쪽으로 흐르듯이 사람의 본성 자체에 선과 불선의 구분이 없다고 했다. 이런 당돌한 고자의 발언에 맹자는 발끈했다.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물의 본성이 있듯이 사람의 본성에도 인의를 바탕으로 하는 성선(性善)이 있다 했다. 순자의 성악설과 대비되는 맹자의 성선설이다. 이런 이분법적 구분을 해체하며 고자는 인간의 본성에 선과 악이 구분이 없다고 한 것이다. 이른바 고자의 성무선악설(性無善惡說)이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선 인간 본성이 악하다고 여기지는 않았다. 인간의 선한 윤리를 생각했다. 중세 시대에 인간의 본성은 존엄해졌다. 하나님 형상대로 태어난 인간이기에 인간은 하나님의 선함을 추구하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근대에 들어서 홉스(Thomas Hobbes 1588~ 1679)는 이기적 본성이 악에 가깝다고 여겼다. 로크(John Locke 1632~1704)는 이성적 본성이 선에 가깝다고 여겼다. 현대에 들어설 무렵 선과 악 논쟁에 강력한 펀치를 날린 이가 있으니 포스트모더니즘의 문을 열어젖힌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다. 그는 선과 악의 절대적 구분을 와장창 깨트렸다. 인간 본성엔 선과 악이 없다고 했던 고자의 2300년 후 환생이 니체 아닐까? 니체를 고자처럼 니자(尼子)로 치켜세울 만하다.
니체 이후 성선과 성악에 관해 딱 한쪽으로만 주장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다만 철학적 본성 논쟁은 생물학으로 번졌다. 성선설-성악설과 결이 다른 이기성-이타성 논쟁이다. ‘이기적 유전자’라는 책은 논쟁에 불을 지폈다. 사실 분자 덩어리 생명정보인 유전자가 무슨 이기성을 가지겠는가? 진화생물학자인 이 책의 저자는 유전자가 이기적이라고 주장하지도 않았다. 은유적으로 과장된 책 제목이었다. 그런데도 유전자 중심주의는 번져갔다. 정말로 우리는 이기적 유전자가 하는 대로 조종당하는 생존기계에 불과할까? 이에 반발하는 학설이 나오며 ‘이타적 유전자’ 라는 책도 나왔다. 경쟁하는 개체의 이기적 유전자와 협력하는 집단의 이타적 유전자 중 무엇이 동물의 행동을 결정할까? 이러한 논쟁은 경제학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인간의 경제적 행동은 이기성과 이타성 중 무엇을 근간으로 할까? 주관적 견해로는 성악설>성선설, 이기성>이타성이다. 한쪽으로 쏠리지 않는다. 인간은 특히 단순히 설명될 수 없는 아주 복잡한 생명체다. 누군가 한 방에 간단명료하게 인간의 본성을 설명한다면? 그를 고자처럼 자급 반열에 올릴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