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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철의 낱말로 푸는 인문생태학]<609> 펠리페와 필리핀 ; 나라 이름

  • 박기철 경성대 광고홍보학과 교수
  •  |   입력 : 2023-04-03 19:52:24
  •  |   본지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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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Turkey)는 국가명을 튀르키예(Turkiye)로 바꾸었다. 2022년 유엔에서도 국가명 변경을 승인했다. 칠면조를 뜻하는 터키라는 단어가 멍청한 겁쟁이를 뜻하기에 국가명으로 적합하지 않아서다. 그래서 자기네 말로 강력한 용사를 뜻하는 튀르키예로 바꾼 것이란다. 지도자 의지가 있고 국민 공감을 얻는다면 국가명은 얼마든지 변경할 수 있다. 그런데 어찌 된 연유인지 국가명을 바꿔야 할 것 같은데, 바꾸어도 될 것 같은데 안 바꾸는 나라가 있으니 필리핀이다.

스페인 전성시대 펠리페 2세의 유산 필리핀.
필리핀 발음은 마약의 일종인 필로폰과 비슷하다. 그래서 국가명을 변경하는 건 논리가 빈약하다. 사소한 발음 문제 이상으로 바꾸어야 할 중대한 이유가 있다. 필리핀(Philleppines)이라는 국가명은 스페인제국 왕세자였던 펠리페 2세(Felipe Ⅱ de Habsburgo 1527~1598)로부터 온 이름이다. 곧 왕이 될 세자에게 아부하려고 마젤란의 후예들이 지어 올린 이름이었다. 마젤란이 1521년 필리핀에 들어와 사망한 이후 50년 만인 1571년에 원주민 토착 세력은 정복되며 필리핀은 스페인 식민지가 되었다. 1588년 영국과 벌인 칼레해전에서 스페인 무적함대가 격파된 이후 스페인 전성시대는 막을 내렸다. 그래도 필리핀은 1898년 미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할 때까지 300년 넘게 스페인 식민지였다.

이후 필리핀은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 식민지이기도 했고 2차 대전 때 일본 식민지이기도 했다. 1946년부터 독립국이 되었다. 엇비슷한 시기인 1948년에 우리는 대한제국이었던 이름을 바꾸어 대한민국이라는 당당한 이름으로 건국되었다. 하지만 필리핀은 스페인 식민지 시절 이름을 그대로 가지고 출범했다. 지금도 그대로다. 식민의 잔재를 지우자며 국가명 변경을 시도한 전임 대통령도 있었지만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아무래도 동남아 국가들 중 유일하게 라틴 아시아 국가인 필리핀의 역사적 내막 때문이라고 판단된다. 애당초 스페인이 원했던 금과 향료가 필리핀엔 없었다. 그러니 필리핀 식민지로부터 이익을 얻어낼 방법은 대규모 플랜테이션 농업밖에 없었다. 대농업을 관리하려면 중앙집권적 통치로는 불가능하다. 지방분권적 봉건제 영주에 해당하는 대농장 지주들이 있어야 한다. 그런 지주들은 중앙귀족과 다른 지방호족이 되어 토호세력인 족벌을 이루었다. 이들 지주가문은 정치가문이 되어 정치권력을 행사하는 지배계층이 되었다. 이들 정치 엘리트들 힘은 지금도 막강하다. 정당정치보다 가문정치를 한다. 여야 이념대립보다 가문 권력대립을 한다. 민주주의보다 엘리트주의를 한다. 역대 필리핀 대통령들은 거의 다 정치가문 출신이다. 1986년 국민 시위로 물러난 마르코스의 아들이 대통령이 된 것도 지주가문에서 시작한 정치가문의 힘이 막강해서다. 정치가문들끼리는 연합해 힘을 키운다. 정치가문들 힘은 스페인 식민지 시절부터 형성된 것이다. 그래서 필리핀이 국가명을 바꾸지 않는 게 아닐까? 전 국민 80% 이상 가톨릭 신앙을 유산으로 남긴 스페인으로부터 권력 유산도 받은 것이기에…. 우리네 잣대로는 이해하기 힘들다. 저들의 사정을 알면 이해가 좀 된다. 이해는 돼도 의아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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