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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거 막고 지하수 파고…생존 몸부림이 공동체 시작이었지”

슬기로운 물만골 탐구생활 <2> 어르신들이 전하는 물만골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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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허가 건물 난립했던 마을초기
- 언제 철거될지 모른다는 불안감
- 경찰 출신 강병운 씨 중심으로
- ‘주민 협동회’ 결성 똘똘 뭉쳐

- 물 많고 물 좋아 물만골이지만
- 지하수 관정 전까진 용수 귀해
- 물 두고 분쟁 심각 “더는 안돼”
- 김작치 씨 등 나서 지하수 개발

- 성공한 사업가였던 이현태 씨
- 큰 사고 당한 후 마을로 이주
- 뛰어난 서예·전각 실력 살려
- 마을 ‘글씨’ 작업 도맡는 일꾼


황령산 골짜기에 있는 물만골은 행정구역상 부산 연제구 연산2동 1통이다. 사진은 지난달 항공촬영한 물만골 마을 전경. 이원준 기자
■공동체 효시 강병운 어르신

부산 연제구 연산동 물만골은 1950년대 피란민이 밀려들면서 형성됐다. 1970년대에는 부산으로 일자리를 찾아 유입된 노동자와 재개발에 밀려난 철거민들이 유입돼 커졌다. 여기에 “사업이 쫄딱 망해 가족과 함께 이곳으로 야반도주” 했거나 “사기를 당해 전 재산을 잃어 집도 절도 없는” 빈민이 몰리면서 물만골 주거촌이 현재에 이르렀다. 대부분 토지를 살 돈은커녕 벽돌 한 장 사기도 힘들었던 탓에 무허가 건물 난립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물만골 마을은 1980년대 초반에서야 행정 편제(연산2동 1통)에 포함됐다. 이곳의 3대 통장인 강병운(80) 어르신은 “지금이야 그나마 집 구실을 하는 건축물이 제법 있지만 옛날에는 말도 못한다. 기자 양반들이 자꾸 옛날 이야기 해달라고 하는데, 이렇게 늙은이도 그 시절을 생각하면 어떻게 견뎠는지 혀를 내두를 만큼 주거환경이 참혹했다”고 회상했다.

“내가 1977년에 물만골 마을에 들어왔어요. 그땐 집이 지금처럼 많이 없었지. 우리 집도 원래 배추 밭이었는데 지주에게 권리금만 100여만 원을 쥐여주고 집을 짓기 시작했어요. 딱히 머무를 곳도 없어 목수에게 사정사정해 한 달 만에 겨우 모양만 갖춘 집을 만든 기억이 나네요.”

강 어르신이 물만골을 찾은 이유는 생활고가 아닌 건강상의 문제였다. 그는 군 복무 기간인 1966년부터 1968년까지 베트남전에 참전한 퇴역군인이다. 1969년 경찰공무원이 됐지만 고엽제 후유증으로 위장장애와 피부발진에 시달렸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꿋꿋하게 일했지만 업무 수행이 힘들 정도로 통증이 계속되자 ‘강 순경’은 퇴직을 결심했다. 당시 퇴직금 200만 원으로 마련할 수 있던 보금자리는 부산에서 물만골 외에는 없었다.

“그때는 우리 마을에 전기 수도 전화 이런 거는 상상도 못했다. 산에서 나무를 베어 아궁이에 불을 피워 밥을 지었고, 식수도 빗물을 탱크에 모아 먹었다. 어두우면 어두운 대로, 비 오면 물 받으면서, 바람 불면 지붕 잡으면서 그렇게 버티면서 하루하루를 살았다.”

당시 강 어르신과 주민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열악한 주거환경보다 ‘구청에서 언제 집을 부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었다. 마을을 대표하는 기구가 없다 보니 예고 없는 철거(행정대집행)가 비일비재했기 때문이다. “철거를 위해 동원된 포클레인에 파손된 집 앞에 드러누운 사람들의 오열·탄식·고성이 하루도 끊이질 않았어.” 마을 주민들이 경찰 출신인 강 어르신을 중심으로 ‘협동회’라는 자치기구를 만든 이유다.

“아마 물만골에서 주민이 자발적으로 조직을 만든 건 이때가 처음일 겁니다. 절박한 사람들이 생존을 위해 뭉친 거죠.” 이렇게 탄생한 물만골 주민 협동회는 훗날 ‘물만골 공동체’의 밑거름이 됐다.


■지하수 있게 한 김작치 어르신

황령산 골짜기에 자리 잡은 물만골은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고 수량이 풍부하다고 해 이름 붙었다. 수만곡(水滿谷)으로 불리기도 했다.

물만골은 2014년 부산에서 마지막으로 상수도가 보급된 동네다. 수돗물 공급 전에는 생활용수를 지하수에 의존했다. 지금도 상당수는 수돗물 대신 지하수를 사용한다.

1995년 지하수가 ‘관정’되기 전까지 물만골은 ‘물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민심도 흉흉했다. ‘물만골 상수도’ 4곳을 만든 전직 통장 김작치(86) 어르신은 “관정이 되기 전에는 물 때문에 주민 간 주먹다짐이 날 정도로 민심이 험악했다”고 회상했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고자 ‘우리 동네에 있는 물인데 왜 우리가 물 때문에 이렇게 고통받나’고 호소했다. 마침내 1992년 지하수 굴착 공사 논의가 시작됐다. 마을 지도자들이 직접 치수를 하면서 구역을 그렸다. 어느 정도 깊이로 땅을 파면 도면을 그려 우리 동네 전체에 돌아갈 물이 얼마나 되는지 점치기도 했다.”

이렇게 물만골 지하수 4정(1~4공구)은 주민의 손으로 만들어졌다. 김 어르신은 “물로 인한 극심한 스트레스에서 해방됐다. 누구도 물을 독점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주민 모두가 하나의 목표를 달성하고자 의기투합했다는 자부심을 갖게 됐다. 그런 의미에서 1~4공구는 물만골의 자존심”이라고 말했다. 물만골 주민은 2010년 한 건설사가 지하수 개발을 추진하자 결사 반대해 저지하기도 했다.

마을 공동체는 지하수 4곳의 관리자를 각각 지정해 관리한다. 지하수 요금은 관리비 명목으로 집마다 1달에 5000원 정도를 받는 ‘정액제’다. 하지만 물로 인한 지난 세월의 고통 때문인지 누구도 물을 펑펑 쓰지 않는다.

김 어르신은 지하수 자랑에 여념이 없었다. “기자 양반들, 여기 있는 동안 세수하고 샤워하고 하면 피부 좋아질 거다. 괜히 황령산에, 그것도 물 많기로 유명했던 물만골의 지하수겠나. 집집마다 딸이나 손녀가 놀러오면 무조건 씻기고 보낸다. 물값 안 받을 테니 물만골에 와서 피부 좋아졌다고 소문 많이 내야 한다.”


‘물만골 지기’ 이현태(왼쪽) 어르신과 국제신문 최혁규 기자가 마을회관에서 만나 대화를 하면서 환하게 웃고 있다. 이원준 기자
■‘물만골 지기’ 이현태 어르신

‘물만골 지기’로 불리는 이현태(84) 어르신은 한때 부산을 넘어 전국을 호령했던 사업가다. 그는 밀가루 없이 착용 가능했던 국내 첫 고무장갑 ‘기린표’의 창업자이자 특허 기술자였다. 경남 거창이 고향인 이 어르신은 처음엔 부산으로 건너와 초량동에서 인쇄업과 도장업으로 생계를 꾸렸다. 서예와 전각에 일가견이 있던 덕분에 큰 돈을 벌어 BNK부산은행 범내골지점이 있는 범내골교차로 일대 토지를 소유하기도 했다.

이 어르신은 일본에서 친척이 사온 고무장갑에 매료돼 업종을 전환했다. “당시 국내에서 사용되던 고무장갑은 뻑뻑해 밀가루를 손에 바르고 착용했어요. 물이 새어 들어가면 밀가루와 섞여 고무장갑 안이 밀가루 범벅이 되곤 했거든. 일본 고무장갑은 밀가루 없이 바로 쓰고 벗고가 되더라니까.”

수년간 고무배합 기술을 연구한 그는 1970년 옛 교통부(범일동) 일대에 ‘기린표 고무장갑’ 생산 공장을 세웠다. 유통망을 확보하고자 당시 사통팔달 교통요지에 거금을 들여 공장을 세운 것이다. 사업은 대박이 났다. “직원들이 월급 안 올려줘도 되니 하루만 쉬게 해달라고 하소연할 정도로 주문이 미어터졌다. 조금 미안한 소리지만 그 때는 돈이 돈이 아니었다. 정말 엄청나게 많이 벌었다.”

하지만 한순간의 사고로 모든 것을 잃었다. “1978년에 부산진시장 앞에서 타고 가던 배달차가 뒤집어졌어요. 뇌를 다쳐 1년 동안 말도 못하고 거동도 불편했지요. 서울의 한 상회에서 1000만 원 줄테니 기린표 판권을 넘기라는 제안이 왔어요. 건강상태와 병원비를 생각하면 다른 선택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그는 30, 40대의 ‘일장춘몽’을 뒤로 한 채 배우자와 2남 2녀에 사고로 일찍 세상을 떠난 동생의 아들까지 데리고 물만골에 들어왔다.

이 어르신은 취재진에게 “물만골에 온 지가 벌써 40년이다. 물만골 오기 전까지의 삶은 다 꿈인 것 같다. 물만골 와서는 뭐 이야기할 게 없다. 그냥 자식 자랑 좀 할까”라고 기자에게 눙을 쳤다.

물만골 지기 이현태 어르신이 취재진에게 선물한 대작. 애국가를 옮겨 적은 한자로 한반도 지도를 그렸다.
“우리 아들은 서울대학(교) 미술대를 나와서 대학에서 강의하다가 작품 활동을 하고 있고, 막내 아들도 서울에서 잘 나가는 무역상이다. 남동생과 오빠 뒷바라지한다고 대학도 안 간 우리 착한 딸래미 둘도 시집가서 잘 살고 있데이. 애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물만골에서 커서 잘 된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물만골이 좋은, 물만골 사람이다. 그래서 내 호가 ‘수곡(水谷)’이다.”

이 어르신의 서예와 전각 실력은 동네에서 정평났다. 동네에 내걸린 현수막 문구와 벽에 쓰인 글씨는 대부분 이 어르신의 작품이다. 요즘은 만장(죽은 이를 기리며 지은 글)을 만드는 일이 많아졌다고 한다. “팔십을 넘기니 만장 쓸 일이 많다. 어쩔 수 있나. 세월이 이런 것을. 우리 마을에서도 내 위로 몇 명 안 남았다.”

이 어르신은 취재진에게 “별 건 아닌데, 우리 마을 온 기념으로 간직해. 여기서 지내는 동안 도장 파거나 글씨 쓸 일 있으면 꼭 맡겨줘”라며 취재진에게 작품을 전달했다. 애국가를 한문으로 적어 한반도 지도를 그린 수곡 선생의 대작이었다.

※이 기사는 부산시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아 취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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