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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한복판 ‘별난 공부방’…주민과 30년 따스한 동고동락

슬기로운 물만골 탐구생활 <5> 물만골 공부방 이야기

  • 김준용 기자 jykim@kookje.co.kr
  •  |   입력 : 2023-06-20 19:41:46
  •  |   본지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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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주교 부산교구 조성제 신부
- 도시빈민촌 평화공동체 꿈꾸며
- 1994년 마을 한가운데 문 열어

- 자연·인간 중심 교육 입소문
- 대학생·교사 등 봉사자 몰려
- 마을 밖 아이들에게도 인기
- 왁자지껄 마을 활기 책임져

- 학생수 급감에 작년 11월 폐쇄
- 이젠 아련한 공동체 추억으로

부산의 외딴 섬과 같은 물만골은 빈곤과 소외에서 벗어나 평화와 협력의 공간을 꿈꿨던 곳이기도 하다. 산업화 속도에 밀려 사라진 공동체 문화를 회복하려는 실험이 10년 넘게 지속됐다. 그 중심에는 ‘물만골 공부방’이 있었다.
‘물만골 공부방’은 1994년부터 지난해까지 28년 동안 마을 주민과 동고동락했다. 사진은 공부방 앞 마당에서 학생들과 자원봉사자들이 체조를 하는 모습. 물만골 지역아동센터 제공
■도심 속 평화공동체의 꿈

지난해 11월 성당도 없는 물만골에서 ‘폐쇄 미사’가 열렸다. 물만골 주민과 동고동락했던 공부방이 공식적으로 문을 닫는 날이었다. 마을 주민은 물론 공부방을 거쳐간 대학생과 직장인도 함께했던 ‘눈물의 미사’였다. 이날 미사는 물만골 공부방을 연 천주교 부산교구 조성제 신부가 집전했다. 국제신문 취재진은 조 신부를 만나 공부방의 역사를 들었다. “도시 한복판에 있으면서도 빈민 밀집도가 높은 반면 1970년대 우리나라 마을의 정서를 가장 잘 유지한 곳이 물만골입니다. 성장과 발전·개발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인간다움이 숨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1994년 1월 물만골 한가운데 공부방이 문을 열었다. 도시빈민사목위원회 소속이던 조 신부의 목표는 평화공동체. 경쟁 일변도 사회에서 벗어나 이웃을 생각하고 서로를 아껴줄 수 있는 곳을 만들고 싶었다. 이를 실현하는 데 물만골 만한 장소는 없었다고 조 신부는 회고했다. “평화공동체는 천주교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1965)의 핵심인 ‘아조르나 멘토’에 근거를 둔 것”이라며 “교회가 직접 세상에 뛰어들어 ‘같이 생활하라’는 정신의 발현이었다”고 말했다. 조 신부는 그때부터 10여 년간 물만골에서 생활했다.

물만골 공부방은 천주교만의 공간은 아니었다. ‘세속적 지식’이 아니라 환경 생태 역사 인권까지 다방면의 지식을 공부하는 곳이 됐다. ‘별난 공부방’이 입소문을 타자 시민사회뿐만 아니라 대학생·교사들이 자원봉사를 위해 몰려 들었다. 이곳에서 공부해 대학에 진학했거나 사회에 진출한 ‘선배’들도 동참했다.

2009년부터 물만골 공부방에서 자원봉사를 한 부산 양동여중 김경애 교사는 “힘든 환경에서 살던 아이들에게 ‘스스로를 사랑하는 법’을 가르치고 싶었다. 학교가 온전히 품을 수 없었던 아이들을 만나면서 오히려 내 마음이 따뜻해지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어 “아직도 그 시절을 잊지 못해 물만골과 가까운 학교 근무를 자청했다”고 덧붙였다. 해운대 엘시티(LCT) 비리를 강도 높게 비판한 고(故) 부산대 윤일성(사회학과) 전 교수도 강사진이었다. 공부방에서 자원봉사를 한 A 씨는 “당시 윤 교수가 물만골에서 스터디를 조직해 사실상 부산 최초로 ‘주거권’ 논의를 시작하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물만골 공부방은 세상을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키려는 젊은이들의 열망이 분출되는 곳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공부방, 30년 역사 마감

지난해 11월 문을 닫은 물만골 공부방 입구. 김현선 아가다 수녀 제공
조 신부는 2002년께 부산 장림성당으로 자리를 옮긴다. 조 신부는 떠났지만 물만골 공부방은 계속 유지됐다. 운영 주체가 천주교 부산교구에서 전교가르멜 수녀회로 바뀌어도 환경·생태·인간에 무게를 둔 교육이념은 계속됐다.

풍파도 닥쳤다. 2004년 아동복지법이 개정되면서 전국의 ‘공부방’이 아동복지시설로 편입됐다. 전국 895곳(2만3347명)에 달하던 공부방이 정부 지원금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반면 물만골 공부방은 무허가 건물 밀집지역에 자리잡은 탓에 충분한 지원을 받지 못했다. 물만골 공부방은 그렇게 10년을 넘게 버티다가 지난해 말 문을 닫았다. 2016년부터 물만골 공부방을 지켜온 김현선 아가다 수녀는 “무허가 지역에 있었다는 이유로 지원금도 반밖에 받지 못하는 상황이었다”며 “2020년에 ‘3년 안에 자리를 옮기라’는 통보를 받고 지난해 11월까지 버틴 것”이라고 설명했다.

공부방의 ‘지위’ 만큼이나 폐쇄에 결정타가 된 것은 바로 학생 수 급감이었다. 2009년 물만골 10대 거주자(주민등록상)는 72명이었으나 지난해에는 11명으로 줄었다. 자녀 3명 모두를 공부방에 보냈던 물만골공동체 박순애 운영위원장은 “공부방 덕분에 골목마다 아이들이 넘쳐났다. 그 때는 아이들 떠드는 소리가 왜 그렇게 컸는지 성가셨는데, 지금은 너무 그립고 아련하다”며 “우리 주민에게 물만골 공부방은 보육이나 학습 공간을 넘어 마을의 활기를 상징하는 시설이었다”고 전했다. 통장 출신인 김작치(83) 어르신도 “젊은 사람들이 책도, 옷도, 학용품도 많이 가지고 와서 동네 아이들에게 나눠줬다. 공부방에 다녔던 직장인들이 월급 받았다고 빵과 음료수를 잔뜩 사들고 오던 장면도 생생하다”고 회상했다.

조성제 신부는 “서로 심판하고 경쟁하는 법이 아니라 아이들이 사회로부터 받은 것을 ‘공유’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치고 싶었다”며 “이를 통한 인격의 완성이 ‘신’을 만나는 과정이다. 이제는 역사가 됐지만 물만골 공부방에서 동고동락했던 수백 명의 학생과 자원봉사자, 무엇보다 우리를 따스하게 맞아줬던 마을 주민의 안녕과 건강을 기도하겠다”고 밝혔다.


※이 기사는 부산시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아 취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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