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은 전설이 되지 못했습니다. 수많은 노동자들을 울리고 시민들에게 충격과 울림을 준 그 죽음은 53년이 지나서도 전설이 될 수 없었습니다. 김주익도 전설이 아닙니다. 내려가면 힐리스(바퀴 달린 신발)를 사주겠다는 아이들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해 미안하다는 유서를 남기고 (85호) 크레인에서 목을 맨 그 전설적인 삶과 죽음도, 아직 전설이 아닙니다. 파업 한 번에 수백억의 손배가압류로 돌아오는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죽은 지 20년이 지나도 잊히지 못하는 이름 김주익, 곽재규….”

30일 오전 11시 부산 영도구 HJ중공업 옛 85호크레인 자리에서 민주노총 부산본부 김진숙 지도위원이 김주익, 곽재규 열사 정신계승제에서 추도사를 읽오 있다. 전국금속노조 제공

　30일 부산 영도구 HJ중공업(옛 한진중공업). 한때 85호 크레인이 솟아있던 그 자리에서 민주노총 부산본부 김진숙 지도위원은 먼저 떠나간 이들의 이름을 부르며 “그냥 다 잊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옛일로 남겨지지 못한, 현재진행형의 비극이 이제는 끝나야 한다고 했다. 이날 전국금속노조는 HJ중공업 사내에서 김주익·곽재규 열사 20주기 정신 계승제를 거행했다. 김 열사는 20년 전인 2003년 10월 17일 85호 크레인(높이 35ｍ) 위에서 고공농성 중 스스로 목을 맸다. 그가 크레인에 오른 지 129일째 되는 날이었다. 김 열사의 죽음에 괴로워하던 곽 열사는 그달 30일 스스로를 내던졌다. 김 지도위원은 이들에게 추모사를 헌정하고자 옛 회사를 찾았다.

　두 열사를 비롯한 노동자들은 사측의 손해배상 청구·가압류에 낭떠러지까지 몰렸다. 당시 노조는 한진중공업의 정리해고에 맞서고 있었다. 2002년 당시 회사는 239억 원의 당기순이익을 냈는데도 노동자에겐 임금 동결을 강요했다. 심지어는 노동자 650명을 정리해고했다. 김 열사가 85호 크레인 상공에 오른 이유다. 투쟁에 나선 노조는 해고를 막고 처우를 보장받으려 했다. 그러자 회사는 노조 간부 20명 앞으로 7억4000만 원의 손배소를 내고 가압류를 신청했다. 임금 50%를 가압류당한 간부들은 한 달에 40만~50만 원으로 생계를 꾸려야 했다. 김 열사 등 간부 7명은 자택까지 가압류당하는 등 심각한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0일 오전 11시 부산 영도구 HJ중공업 옛 85호크레인 자리에서 열린 제20주기 김주익 곽재규 열사정신계승제에서 참석자들이 헌화하고 있다. 전국금속노조 제공

　김 지도위원 또한 85호 크레인에 올라 309일간 고공에서 싸웠다. 한진중공업이 노동자 400명을 희망퇴직시키려 한 것에 반발, 2010년 12월 15일 투쟁에 나섰다. 김 지도위원은 “이름이 다른 장례식을 같은 공장에서 치르며 슬픔을 대물림하며 여기까지 왔지만, 우린 긴 세월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았다”며 “그 처참한 죽음들을 만들어 낸 민주노조 탄압, 열악한 근로조건들이 옛날 옛적의 전설로 남겨지는 그런 날이 오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한편 사용자의 무차별적인 손배·가압류를 제동하는 취지로 추진 중인 ‘노란봉투법’(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개정안)은 다음 달 9일 국회 본회의에 회부돼 표결에 부쳐질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