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 가야의 맹주라 불리는 금관가야는 언제, 누가 세웠을까? ‘삼국유사’에는 서기 42년 수로왕이 세웠다고 소개하지만 고고학적 근거는 빈약하다. 대성동 고분이 발굴되면서 금관가야 성립 논쟁은 고고학계의 핫 이슈가 되었다.
대성동 고분의 발굴 주역인 신경철(부산대 명예교수)은 북방계 유물 등을 바탕으로 1990년 초 ‘부여족 남하설’을 제기했다. 서기 3세기 말께 북방의 부여족이 동해안 해로를 타고 남하, 김해지역을 점령하고 금관가야를 세웠다는 가설이다. 신 교수는 김해 대성동 고분군과 부산 복천동 고분군 중 3세기 말~5세기 초에 걸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구릉 정상부의 목곽묘 부장품에 주목했다.
이곳에서 나온 도질토기(섭씨 1200도 고온에서 소성)와 철제 갑주류, 오르도스형 동복(銅鍑, 이동식 청동솥), 몽고발형주 등의 유물과 선행묘 파괴, 순장 풍습 등이 그 이전과는 구분되는 북방민족의 습속 또는 이동 흔적이 아니겠느냐는 것.
대성동 고분이 처음 발굴되었을 때는 왜국에 의한 김해 임나일본부 존재설이 부정됐다는 점에 주목했으나, 동복 등 북방계 유물에 대한 연구가 진척되면서 금관가야 성립 논쟁으로 확대됐다.
‘부여족 남하설’에 대한 학계 반응은 차가웠다. 북방계 기마민족이 남하해 한반도를 거쳐 일본까지 갔다는 에가미 나미오 전 도쿄대 교수의 ‘기마민족설’ 아류가 아니냐는 지적도 나왔다. 이에 대해 신경철은 “에가미 나오미 교수와 나의 학설은 이동 루트부터 완전히 다르다”고 반박한다.
‘부여족 남하설’은 역사적 사실의 여부는 논외로 하더라도 거의 공백 상태이던 4세기대의 가야사를 복원하는 실마리가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하지만 ‘삼국유사’에 언급된 가락국 건국연대(서기 42년)와 달리, 금관가야 건립 시기를 3세기 무렵으로 내려 잡아야 하고, 멸망 시기도 5세기 초까지 앞당겨지는 문제가 남는다. 이 때문에 근래에는 3세기 후반 이후 새로운 집단이 이주해 금관가야를 건국했다기보다 삼한 시기의 구야국이 금관가야로 발전했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늘어나는 추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