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티켓 보급 덕 철도망 이용 급증
- 200년 낡은시설 탓 정시성 89%
- 철로 부족한 지역 형평성도 논란
- 같은 요금 내고 버스 밖에 못타

- 독일 연정, 시설 현대화에 초점
- ‘깡촌’까지 편익 미칠 방법 필요
- 이미 ‘서울공화국’한국에 시사점
- 지역민 위한 ‘로컬티켓’ 등 고려

“당신들 베를린으로 가죠? 이 플랫폼에서 타는 건 맞는데, 뛰지 마세요. 서두를 필요 없습니다.”

지난달 21일 독일 작센안할트 비텐베르크역 오르막 계단을 허겁지겁 내달리던 ‘독일교통정책연구팀’을 향해 독일 청년이 말을 건넸다. 계단 맨 위 플랫폼에 선 그는 양 손바닥을 펼치곤 위아래로 천천히 ‘워, 워’ 손짓도 보냈다. 환승까지 1분밖에 남지 않아 발걸음을 재촉하던 연구팀이었다. 뚱딴지 같은 그의 말에 당황한 것도 잠시. 표시판 속 베를린행 S반(광역전철)이 11분 연착됐다. ‘지각’을 알리는 방송도 연신 흘러나왔다.

■독일 철도 정시성 이슈

지난달 21일 독일 라이프치히역 플랫폼에서 승객들이 열차에 오르내리고 있다. 라이프치히는 독일 작센주의 대표 도시로, 작센은 베를린과 달리 지역 내 마을을 촘촘하게 잇는 교통망이 비교적 열악하다. 독일교통정책연구팀 제공

그날 연구팀은 작센주 라이프치히에서 브란덴부르크주를 지나 베를린 중앙역으로 향하는 열차에 올랐다. 주(州)와 주를 오가는 장거리 여행인 만큼 S반과 RE(급행열차)를 이용했는데, 달리던 열차가 대뜸 철로 한복판에 멈춰서는 일이 허다했다. 열차가 연착에 연착을 거듭한 끝에 연구팀은 결국 최초 예정보다 40분 늦게 역에 도착했다. 말로만 듣던 ‘정시성 위기’를 체감하는 순간이었다. 독일 철도는 시간 못 지키기로 악명 높다.

독일의 철도 정시성 문제는 나날이 심화한다. 독일 국영철도기업 ‘도이체반’에 따르면 지난해 독일철도의 정시도착률은 89.4%다. 이는 최근 10년간 가장 낮은 수치다. 장거리 열차의 정시 도착률은 62.5%로 특히 심각하다. 도이체반은 연착 시간이 6분 미만이면 정시로 분류하니, 엄격한 의미의 정시를 기준으로 한 통계도 아니다. 정시도착률이 99%를 넘고 도시철도가 5분만 늦어도 뉴스가 되는 한국에선 상상하기 힘든 지각 빈도다.

현지는 정시성 위기를 철도 인프라의 문제로 판단한다. 철도 역사가 200년에 가까운 독일은 세월만큼이나 낡은 시설을 보유했다. 그러니 속도 제한 구간이 많다. 게다가 베를린 중앙역과 같은 허브 구간의 경우 통과 열차에 견줘 설치된 철로는 제한적이다. 수많은 열차가 몇 안되는 철로를 공유하는 셈인데, 열차 간 안전거리인 ‘폐색구간’을 지키려 주행 중 정차하는 일이 잦다.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철도 인프라에 빨간 불이 켜진 것이다.

2022년 ‘9유로 티켓’으로 처음 도입된 ‘독일티켓’은 이 문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철도 이용객 대폭 증가가 정시성 하락을 부채질했다. 가장 상징적인 사례가 지난해 독일에서 열린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UEFA 유로 2024)다. 전세계 축구 팬이 독일로 몰려왔는데, 수시로 늘어지는 열차 시간 탓에 경기를 놓친 해외 팬들이 적지 않았다. ‘독일티켓만 있으면 열차로 어디든 갈 수 있다더니, 정작 열차가 오지를 않는다’는 불만이 들끓었다.

■정시성에 가려진 지역격차

브란덴부르크 위터보그행 열차의 연착(Aktuell·‘현재’란 의미)을 알리는 표시판. 신심범 기자

독일티켓이 들춘 인프라 문제는 이뿐 만 아니다. 인프라가 갖춰진 지역과 그렇지 못한 지역 간 격차 또한 수면 위로 올랐다. 오히려 이 지점을 핵심으로 여기는 시각도 적지 않다. 독일티켓 가격은 도시인이나 농촌인이나 월 58유로다. 재정 부담도 같아서, 베를린이든 ‘깡촌’이든 주정부분(15억 유로)을 갹출한다. 이런 가운데 베를린 주민은 적어도 지역 내에선 90% 수준의 정시성을 가진 철도를 무제한 이용하지만, 시골 사람은 배차 간격이 한 시간에 이르는 버스밖엔 탈 게 없다.

독일 연방의회 마르쿠스 프랑케 작센주 대표(주정부대표부 의장)는 “독일티켓의 장점을 최대화하려면 근거리 여객 수송망이 촘촘해야 한다. 그런데 작센의 경우 드레스덴에서 라이프치히로 가는 중간 중간에 고속철도 등으로는 갈 수 없는 마을이 많다. 즉, 현재는 도시 거주자에게 더 많은 혜택이 돌아가는 상태다”며 “반대로 도시에선 독일티켓 이용자가 단거리 교통 수단을 필요 이상으로 과대 사용하는 경우도 보인다”고 지적했다.

사정이 이러니 ‘인프라 이슈’는 두 갈래의 요구로 나뉜다. 낡은 철로를 현대화하자는 주장과 철로가 부족한 지역에 신규 인프라를 설치하자는 목소리다. 두 가지 모두 필요하지만, 어느 영역에 먼저 국고를 열어야 하는지를 두고는 견해가 충돌한다. 작센주처럼 옛 동독에 속해 비교적 인프라가 열악한 지역에선 철도망 인프라의 확충에 투자해야 한다고 소리 높인다. 반면 옛 서독 등에선 노후 시설 현대화를 강조하는 경향이 크다.

현재로서는 ‘시설 현대화’에 힘이 실리는 모양새다. 지난 9일 독일 기독민주당·기독사회당·사민당 연정은 독일티켓과 철도 인프라망 등에 관한 합의를 발표했다. 독일티켓은 2028년까지 현재 요금 수준으로 유지하면서 철도 투자를 늘리는 게 골자다. 특히 간선·보조 노선의 확장을 짚었다. 폴란드·체코로 향하는 교통 인프라의 핵심구간을 빠르게 확장하고, 대도시간 철도의 ‘고성능 회랑’ 구간의 개조 작업을 지속하겠다는 게 연정의 계획이다.

■‘탱자 된 귤’ 피하려면

철도 중심지로 점차 인구가 모이는 현 상황에서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 모른다. 가령 수도 베를린과 교통망 상당수를 공유하는 ‘위성도시’ 브란덴부르크에는 베를린의 높은 집값에서 벗어나 주거지를 옮긴 이들 덕에 인구가 늘고 있는 추세다. 특히 베를린으로 접근하기 편리한 지역, 즉 교통 인프라가 잘 갖춰진 지역의 인구 증가가 월등히 클 것으로 전망된다. 시설 현대화에 돈을 쓰는 것이 인구 대비 편익이 크다는 말이다.

한편으로 이는 독일 내 지역 간 ‘인프라 형평성’이 어느 정도로 무너졌는지 보여준다. 평소에는 느끼지 못하던 지역 간 격차가 독일티켓 즉 교통의 영역에서 폭로됐다. 나아가선 머릿수의 문제로 불공평 수준은 점차 심화한다. 이미 거미줄처럼 얽히고설킨 베를린주 철도망은 점차 현대화하지만, 인프라가 변변하지 못한 하노버주는 수요응답형 대중교통(DRT)에 의존해 지역 교통체계를 꾸려야 한다.

베를린주의회 크리스티앙 론네부르크 의원은 “독일티켓은 지역별로 인프라 수준이 상이하다는 문제를 환기시켰다. 교통뿐만 아니라 지역공동체의 인구 교육 의료 서비스 등 모든 부분이 공동화하는 점을 보여줬다”며 “인프라 형평성을 담보하는 새로운 투자로 나아가는 사회개혁이 필요하다. 당장 시골지역 주민에게 독일티켓의 편익을 줄 수 없다면, 그에 상응하는 대체 편익을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내에서도 독일을 비롯한 ‘선진국’의 대중교통 정책에 관심이 높은 가운데, 독일티켓이 촉발한 ‘인구 대비 편익’의 함정은 반드시 피해야 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정책이 가진 장점은 살리면서도 그 편익이 지역 ‘오지’에까지 미칠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취지다. 독일티켓 등이 가진 잠재성은 연구하면서도, 국내의 수도권 일극주의로 대변되는 지역 간 인프라 불형평을 줄이는 방법 또한 동시에 강구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남원철 독일교통정책연구팀장은 “독일티켓은 대중교통 편익을 크게 높였다. 동시에 이미 교통 인프라가 잘 구축된 지역에 더 많은 투자가 이뤄지도록 했다. 국내에 독일티켓이 그대로 이식되면 이미 광대한 수도권 교통망의 거대화·세밀화를 더욱 심화할 수 있다. 우린 지금도 인구가 적은 지역엔 철로를 놓지 않는다. 독일 사례는 어쩌면 한국엔 ‘로컬티켓’이 필요하다는 점을 말하는 지 모른다”고 설명했다.


※연구팀=이진 소장, 남원철 팀장(지역노동사회연구소 운영이사). 김상철 연구원(공공교통네트워크 정책센터장). 이영수 연구원(사회공공연구원 선임연구위원).

◇ 독일 철도 정시도착 현황 연도  전체 철도  정시도착률  장거리 철도  정시도착률 2020년   95.1%   81.8% 2021년   93.7%   75.2% 2022년   90.9%   65.2% 2023년   90.1%   64% 2024년   89.4%   62.5% ※자료 : 도이체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