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배상 소송을 진행해 항소심에서도 승소한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가 의식불명의 중태에 빠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피해생존자는 항소심에서 패소한 정부가 뒤늦게 상고한 사실을 알고 비통함을 이기지 못해 약물을 복용하고 길을 거닐다 사고를 당한 것으로 전해져 안타까움을 더한다. 피해생존자들은 정부가 2차 가해에 해당하는 기계적 상소를 멈추고 보상과 사죄를 조속히 이행해야 한다고 말한다.

과거 형제복지원 전경. 국제신문DB

11일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모임과 부산시에 따르면 지난 10일 오후 7시께 부산진구 가야동 노상에서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홍영식(56) 씨가 거리를 거닐다 머리를 크게 다치는 사고가 일어났다. 당시 뇌출혈 증세를 보인 홍 씨는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의식불명 상태에 현재 매우 위독한 상황이다.

홍 씨는 지난 9일 정부가 자신이 당사자인 형제복지원 피해자 국가배상 청구 소송에서 상고기간 마지막 날 상고장을 제출한 것을 두고 크게 상심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긴 시간 끝에야 피해 사실을 인정받고, 국가배상을 받기 위해 1심과 2심에서 승소까지 했으나 정부의 상고로 또다시 확정판결이 미뤄지자 큰 스트레스와 함께 매우 비통해했다고 한다. 이에 다량의 약물을 복용하고 길을 나섰다 사고를 당한 것으로 파악됐다.

홍 씨는 1980년에 형제복지원에 끌려가 1986년에야 시설을 나왔던 것으로 전해졌다. 여느 강제수용시설 피해자들이 그렇듯 평소 몸 상태가 좋지 못했으며, 홀로 부산에서 살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정부는 1심 국가배상 판결에 이어 지난달 18일 형제복지원 피해자 국가배상 청구 항소심 선고에서도 항소가 기각됐다. 그러나 상고 마감일인 지난 9일 법원에 상고장을 제출해 소송이 대법원으로까지 가게 됐다.

이에 국가폭력 피해자들 상대로 정부가 2차 가해를 저지른다는 비판이 꾸준히 제기됐다. 정부가 형제복지원 사건에서 대부분 패소하고 있는데도 기계적으로 상소(항소·상고)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2022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화위)의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규명 결정을 전후로 지금까지 전국에는 40건 이상의 유사 소송이 제기돼왔다. 국가는 이들에게 지급해야 할 위자료가 너무 과중하다는 이유로 상소를 반복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간 판결에서 ‘구금 햇수당 위자료 8000만 원’의 산식이 정립되면서, 피해생존자 규모 등으로 추산했을 때 최소 20조 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진화위도 지난 10일 과거사 사건과 관련한 국가의 무분별한 상소를 자제해달라고 촉구했다. 박선영 진화위 위원장은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라는 말이 실현될 수 있어야 한다”며 “진실규명에 근거한 국가배상청구 소송에서 ‘정의’가 지연되지 않도록 법무부의 적극적인 전향을 요청한다“고 강조했다. 앞서 지난해에만 피해생존자 3명이 기나긴 법정 공방 과정을 지켜보다가 결국 유명을 달리한 것으로 알려졌다.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최승우 씨는 “국가가 매뉴얼대로 기계적 상소를 반복하는 동안 피해자들이 계속해서 세상을 떠나고 있다”며 “국가가 판결에 승복하고 조속한 사과와 배상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