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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시가 ‘2028 세계디자인수도(WDC·World Design Capital)’로 선정됐다. 전 세계 열한 번째로, 국내에서는 서울(2010년)에 이어 두 번째다. WDC는 세계디자인기구(WDO)가 2년마다 디자인을 통해 경제·사회·문화적 발전을 추구하는 도시를 선정하는 국제 프로젝트다. 디자인을 도시의 전략적 자산으로 바라보는 이 프로그램은 삶의 질과 도시의 미래를 함께 고려한다. 부산은 인구 1300만 명이 넘는 중국 항저우를 포함한 여러 도시를 제치고 이 타이틀을 얻었다.
지난달 WDO 실사단은 부산에서 ▷영도 베리베리굿봉산마을 ▷산업 유산을 재생한 ‘F1963’ ▷부산항 북항 일원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공간 ‘도모헌’ ▷동서대학교 등을 돌아봤다. 실사단이 찾은 부산의 모습은 어떨까.
● 빈집 줄게 살러 올래?
빈집 정비의 성공 사례로 알려진 영도 봉산마을. 오래전 조선업 노동자들의 거주지였지만, 조선업 불황과 인구 고령화가 겹쳐 주민이 점점 자취를 감췄다. 아이들도 보기 어려워졌다. 이에 국토교통부는 2017년 봉산마을을 도시재생 뉴딜 사업지로 선정해 2020년부터 빈집 활용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8개 빈집을 고쳐 청년 크리에이터가 체험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있게 공짜로 빌려줬다. 이른바 ‘빈집 줄게 살러 올래’ 프로젝트. 이경진 봉산마을협동조합 사무국장은 “여러 체험 활동으로 관광객을 유인해 마을에 활기가 돌게 할 수 있다”며 “개인은 물론 단체 관광객이 자주 찾는다”고 말했다.
● 폐공장이 ‘관계의 장’으로
수영구 망미동 복합문화공간 F1963. 이 공간은 45년간(1963~2008년) 선박용 와이어를 생산하던 고려제강 폐공장을 재생해 만들었다. 전시·공연장은 물론 서점과 카페 등이 어우러진 곳으로 탈바꿈했다. 2019년 ‘대한민국 공간복지 대상’ 최우수상을 받으며 지역의 문화 허브로 자리매김했다. 벽돌 기둥과 목재, 기름으로 얼룩진 바닥, 벗겨진 페인트 등 오랜 세월 공장의 흔적은 F1963 내 카페·전시관 등 곳곳에 켜켜이 남았다. 부산의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고, 산업 시설이 예술을 경험하는 장소로 재탄생한 대표적 사례다.
F1963을 기획한 고려제강 이안기 이사는 “버려진 공장이 예술과 사람을 잇는 관계의 장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기획했다”며 “주민이 전시에 참여해 함께 어울릴 때 이 공간이 진짜 지역의 일부가 됐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했다.
● 근현대사 품은 산복도로
동구 초량동 산복도로에 놓인 이바구길은 도시재생 디자인의 살아 있는 현장이다. 낡은 벽과 계단, 철제 난간 등 평범했던 골목이 ‘168계단 모노레일’ ‘이바구 공작소’ ‘시간을 품은 집’ 등 프로젝트로 디자인 산책로가 됐다. 벽화나 표지판 같은 장식도 그저 ‘보기 좋게 꾸미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피란민 마을로 형성됐던 산복도로 과거를 토대로, 이곳 주민의 삶과 그들이 살아온 시간을 전달한다. 관광객 김진영(32) 씨는 “산복도로에서 내려다보는 부산의 풍경은 말로 담기 어려울 정도로 벅차다”고 치켜세웠다.
부산에는 이 공간들 외에도 디자인이라는 언어로 말을 거는 장소가 흩어져 있다. 해안 절벽을 따라 이어지는 산책길, 낡은 공장의 온기를 살린 공간, 오래된 계단 골목의 모노레일…. 거창하거나 특별할 필요는 없다. 때로는 오래된 계단을 다시 닦는 일, 텅 빈 역사(驛舍)를 아이들 웃음소리로 채우는 일, 그리고 골목 어귀에 앉은 작은 벤치 하나에도 디자인은 스며든다.
디자인은 공간의 기억을 되살리고, 사람을 다시 불러들이는 힘이다. 그런 힘을 가진 장소가 지금 부산 곳곳에서 조용히 빛나고 있다. WDC 타이틀은 단지 ‘성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산이라는 도시를 다시 어떤 방식으로 채워갈지 고민하는 출발점이 돼야 한다. 그 해답은 오래된 골목 어딘가, 낡은 창고 안 어딘가에서 이미 소리 없이 피어나고 있을지도 모른다.
WDO는 “부산은 디자인 문화를 통한 도시 변화의 높은 잠재력을 지녔다. 지표 기반의 지역 분석과 개선 방식은 국제사회에 모범이 될 수 있다”며 “이번 WDC 선정으로 부산이 국내를 넘어 세계적으로도 의미 있는 영향력을 발휘하길 기대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