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에 납치됐던 C 씨가 구조요청을 위해 보냈던 텔레그램 메시지. 박찬대 의원실 제공

“월급 많이 주겠다”는 말로 유인해 납치하고, 묶어 놓고 일 시키고, 말 안 들으면 때리고 고문합니다. 영화에서나 볼 법한 일이 캄보디아에서 발생했습니다. 앙코르와트 같은 관광지로 익숙한 캄보디아가 ‘여행 가기 무서운 나라’로 전락했는데요. 한국인 납치·감금 제보가 계속되는 가운데 캄보디아에 대한 ‘혐오 정서’ 역시 한국 사회 전반에 퍼지고 있습니다.

캄보디아에서 한국인을 노린 강력 범죄가 잇따릅니다. 지난 7월 17일 가족에게 “현지 취업 박람회에 다녀오겠다”고 한 뒤 캄보디아로 출국한 20대 남성 A 씨가 2주 만에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습니다. 캄보디아로 떠난 지 일주일쯤 된 무렵 A 씨 가족은 조선족 말투를 쓰는 한 남성으로부터 “A 씨가 캄보디아에서 사고를 쳐 감금됐다. 5000만 원을 보내주면 풀어주겠다”는 협박 전화를 받았습니다. 서둘러 경찰과 외교부에 신고했지만, A 씨는 결국 캄보디아 캄폿주 보코산 인근 검은색 차 안에서 숨진 채 발견됐습니다. 고문에 따른 심장마비가 사인입니다.

지난 11일에는 캄보디아 시아누크빌 한 호텔에 감금됐던 한국인 남성 2명이 더불어민주당 박찬대 의원실의 도움으로 현지에서 구조됐다는 소식도 전해졌습니다. B 씨와 C 씨는 IT 관련 업무를 하면 월 800만~1500만 원 고수익을 보장한다는 온라인 구인 글을 보고 캄보디아로 향했는데요. 막상 도착하니 회사는 공무원을 사칭한 보이스 피싱 범죄 단지였죠. 범죄에 가담하지 않겠다고 거부하자 쇠파이프와 전기충격기 등으로 구타당했고, 가까스로 구조 요청에 성공해 160여 일 만에 구조됐습니다. B 씨는 바로 옆방에도 한국인 3명이 있었다면서 “다른 한국인들은 아직도 구조를 기다리는 상황”이라고 전했습니다.

이후 전국에서 캄보디아 납치·의심 신고가 빗발쳤습니다. 부산경찰청은 이달 초 관련 신고를 2건 접수해 확인 중이고요. 올해 경남경찰청에는 캄보디아 관련 실종 신고가 총 11건 접수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캄보디아에서 연락 두절 또는 감금됐다는 신고는 2021년 4건, 2022년 1건, 2023년 17건에서 지난해 220건으로 급증한 데 이어 올해 상반기(1~8월)에만 330건에 달했는데요. 외교부는 올해 260명, 지난해 210명은 신고 뒤 ▷현지 경찰의 체포 ▷구조 후 추방 ▷자력 탈출 ▷귀국 ▷연락 재개 등을 통해 감금 상태가 아닌 것이 확인됐다고 밝혔습니다. 이에 올해 8월 기준 안전이 확인되지 않은 한국인은 80여 명으로 추산되죠.

● 캄보디아 장악한 중국 범죄 조직

1990~2000년대 캄보디아 등 동남아시아 국가에서 카지노 산업이 급성장합니다. 도박 산업을 기반으로 활동하던 중국 범죄 조직이 활동 영역을 넓히면서 그들의 막대한 자본이 동남아로 투입돼 카지노·호텔·리조트가 건립됐죠. 그런데 코로나19로 관광 산업이 몰락하자 범죄 조직은 이곳을 아지트 삼아 각종 온라인 사기를 벌이기 시작합니다. 국제앰네스티 등 국제단체는 이런 곳을 사기 범죄 단지(Scamming compound)라고 부르는데요. 국제앰네스티가 캄보디아 내 사기 범죄 단지 피해자 58명을 인터뷰한 보고서는 캄보디아에 최소 53개 대규모 사기 작업장이 있다고 밝혔습니다.

캄보디아는 민족 대학살 사건 ‘킬링필드’를 주도했던 크메르 루즈가 붕괴한 이후 훈센 상원의장이 40년간 통치합니다. 오랜 기간 독재와 부패로 치안력이 약해진 탓에 범죄 조직이 활발하게 움직이는 환경이 만들어졌죠. 미국 국무부가 발간한 ‘2025 인신매매 보고서’는 캄보디아 일부 고위 공무원이 사기 범죄 단지를 소유해 단속 정보를 미리 입수하거나, 시설이 적발되더라도 벌금을 내고 업장을 다시 운영한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캄보디아 범죄 산업은 국내총생산(GDP)의 절반가량인 연간 125억 달러(약 17조 원)에 달하는데요. 결국은 ‘돈’ 때문에 캄보디아 정부가 그들의 범죄를 묵인한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무서울 것이 없어진 범죄 조직은 한국 중국 대만 베트남 태국 등에서 ‘고수익 일자리’를 제공한다는 온라인 공고로 청년을 유인해 납치·감금한 다음 범죄에 가담시키는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철문, 높은 담벼락, 무장 경비원에 둘러싸인 건물에 가두고 폭행·고문하면서 주식 리딩방, 보이스 피싱, 온라인 도박, 로맨스스캠, 마약 밀수 등 범죄에 이용하죠.

● ‘혐오’ 직면한 캄보디아인

상황이 심각해지자 외교부는 지난 16일 납치·감금 피해가 급증하는 캄보디아 캄폿주 보코산 등 일부 지역에 여행경보 4단계 ‘여행금지’, 시아누크빌 주에는 3단계 ‘출국권고’를 발령했습니다. 박성주 경찰청 국가수사본부장은 지난 15일 캄보디아를 방문해 관할 당국과 구금된 한국인 송환 계획을 협의했고요. 합동 대응팀도 파견했습니다. 국제경찰청장회의가 열리는 오는 23일에는 유재성 경찰청장 직무대행이 캄보디아 경찰청 차장과 만나 캄보디아 내에 코리안 데스크(한인 사건 처리 전담 경찰관)를 설치하는 방안을 논의할 예정이라고 하죠. 이재명 대통령은 “가용 자원을 총동원해 신속하고 확실하게 이 문제에 대응해 달라”고 당부했습니다.

캄보디아에 대한 ‘혐오 정서’도 급속히 번집니다. 국내에 체류 중인 캄보디아인, 관광객, 심지어 교민까지 무분별한 피해를 보죠. 설동훈 전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객관적 사실과 혐오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고 진단했습니다. “‘캄보디아 공권력이 제대로 작동 안 한다’는 사실이지만, ‘캄보디아 사람은 전부 나쁘다’는 혐오입니다. ‘캄보다아에서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 대부분이 중국인’이라는 말과 ‘중국인이 문제’라는 말은 달라요. 특정 범죄자가 지탄받을 일이지 캄보디아나 중국이라는 나라 전체를 비난하는 것은 비합리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