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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수 이원미술품복원연구소 대표가 울산 울주군 서생면 전원주택 정원에서 아내와 함께 환하게 웃고 있다. 본인 제공 |
- 시립미술관 선임으로 18년 재직
- 2019년 울산 울주 서생면 귀촌
- 150여평 화단·나무 직접 가꾸면
- 인생의 번잡함 온전히 잊게 돼
- 잠시 놓은 붓, 퇴직 뒤 다시 들어
- 美서 연구교수로 예술시야 넓혀
- 이제는 공공미술관 운영의 꿈
◇ 이상수의 인생이모작 귀띔
- 못다 한 꿈에 일모작 경험 더해, 남은 삶을 다시 추진하라
새벽 4시, 울산 울주군 서생면의 산자락은 아직 어둡지만, 그는 오늘도 명상을 하고 삽과 호미로 정원을 돌본다. 이곳에 정착한 처음 2년 동안은 아침밥을 먹기 전까지 네 시간이나 정원을 손질하기도 했다. 230여 평의 전원 부지는 한두 주만 소홀해도 풀이 무성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은퇴 후 이곳으로 옮긴 것은 주소 한 줄이 바뀐 사소한 일이 아니다. 조직에 맡겨두었던 시간의 주도권을 되찾고, 청춘기에 품었던 화가의 삶을 다시 추구하는 큰 변화였다. 동해선 서생역에 내려 여름꽃이 무성한 그의 정원을 찾았다.
-높은 천장과 장작 난로가 있는 거실도 인상적인데, 정원에서는 산과 바다가 눈에 확 들어옵니다. 언제부터 이곳에 사셨습니까.
▶2019년에 집을 지어 들어왔으니 올해 7년 가까이 됐습니다. 20여 년 살던 해운대의 아파트를 정리하고 여기로 왔죠. 부산 인근의 여러 전원주택지를 둘러보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풍경 앞에 서자 “정말 이런 데서 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230여 평의 전원주택을 직접 만들었다고요.
▶설계와 건축을 외부에 맡겼지만, 집을 제외한 150여 평의 정원은 애초 황토와 마사토로 된 빈 땅이었어요. 아내와 함께 삽과 곡괭이를 들고 땅을 고르며 나무와 꽃을 심었죠. 아내는 손가락 골절을 입기도 했습니다만, 지금은 여름이라 잡초를 뽑고 화단을 손보느라 바쁩니다. 정원의 풀꽃 속에 앉으면 인생의 번잡함을 온전히 잊게 됩니다. 이런 몰입이 마음에 여유를 주고 창작 아이디어도 만드는 것 같습니다.
이번에 만난 이는 이상수(67) 전 부산시립미술관 학예연구관이다. 그는 1997년 부산시립미술관 1호 학예연구사로 선발돼 시립미술관 개관 마스터플랜을 작성하던 일부터 2015년까지 18년간 전시기획과 소장품 관리를 담당했고, 지금은 이곳에 들어왔다. 도시의 선임 학예관이었던 그가 이제 전원의 생활자가 된 것이다.
-이곳으로 곧바로 들어온 것은 아니더군요. 정년을 약 4년 남기고 명퇴한 뒤 먼저 미국으로 떠나셨다고요.
▶그렇습니다. 미국으로 갔었어요. 저는 회화 작업을 너무나 하고 싶었어요. 미술관에서는 늘 그림과 함께 했지만 시간에 쫓겨 정작 작품 활동을 하기가 힘들었어요. 50대 중반에 “도저히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명퇴를 결심했고, 바로 미국으로 건너갔었어요.
-그럼 직장을 관두고 미국에 머무는 동안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현대미술의 최전선인 뉴욕과 보스턴의 공립·사립미술관을 다니면서 작품을 보고 전시 동선과 공간 운영 방식을 공부했습니다. 학예사가 된 후 거의 20년 동안 못 했던 그림도 다시 그렸고, 개인전도 열며 뉴욕 아티스트들을 만났어요. 그러던 중 조지타운대학교에서 연구교수로 활동할 소중한 기회를 얻었어요. 공무원 생활을 하며 유보할 수밖에 없었던 가슴속 열망을 따라 그렇게 생활했습니다.
-그전에도 해외에서 미술을 공부한 경험이 있었습니까.
▶저는 학예사가 되기 전 호주를 거쳐 인도 델리대 대학원에서 공부한 적이 있습니다. 학예사로 근무할 때도 휴직을 하고 전액 자비로 이탈리아에 가서 유화 복원을 공부해 자격시험을 통과하기도 했어요. 그다음에는 인도 국립문화재보존연구소에서 유화를 비롯해 미술관과 박물관에 들어가는 여러 종류의 문화재 보존법을 배우는 등 해외 경험이 많습니다.
들어보니 미술의 국제적 흐름에 함께하고자 한 그의 열망은 평범하지 않았다. 그는 그 열망을 막연한 동경으로 남겨두지 않았다. 더 많은 연금을 받을 기회까지 내려놓는 대가를 치르면서도 자신의 삶으로 실행했다.
-조지타운대 연구교수 생활과 미국 미술관 답사를 마치고 귀국한 뒤에는 어떤 활동을 이어갔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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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초 ‘이우환 공간’ 건립 때 공사 현장에서 이우환 선생이 당시 이상수 학예관에게 작품 설치 지침으로 준 드로잉. 본인 제공 |
▶미국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뒤 부산대 등에서 미술 강의를 하고, 작가론과 도록을 쓰며 미술 관련 글을 여러 곳에 기고하고 있습니다. 작품 활동도 계속하고, 이탈리아에서 익힌 복원 기술을 살려 고가 미술품의 복원 의뢰도 받습니다. 그리고 미국으로 떠나기 전 마련해 두었던 이곳에 집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이곳 전원주택도 오랜 계획 속에서 이뤄진 일이군요. 어쩌면 집을 지은 것이 아니라 ‘생활의 양식’을 지은 것 같아요.
▶저는 시립미술관에서 일하던 2000년대 중반부터 부산 근교의 땅을 보러 다녔어요. 그러다 살던 집을 처분해 일부는 땅값으로 쓰고 전세로 옮겼죠. 미국에서 돌아와 돌려받은 전세금으로 집을 짓겠다는 계획에 따라 진행한 거예요. 2019년 겨울에 이곳으로 들어왔습니다.
-이곳 전원생활에서 가장 얻고 싶었던 것은 무엇입니까.
▶밖에서 사람을 만나 일하더라도 어느 순간에는 별도의 공간에서 혼자 생각하고 음악도 들으며 미술 작업을 하고 싶었어요. 명상적인 태도로 스스로 침잠하고 돌아볼 수 있는 곳 말입니다.
명예퇴직 이후 시작한 그의 인생이모작은 매우 체계적인 인생 전환이란 생각이 대화 중에 많이 들었다. 퇴직 후 미국에서 안목을 넓힌 지적 전환, 회화를 재개한 직의 전환, 전원으로 이주한 생활의 전환이 차례로 맞물린 과정이었다.
-명퇴와 여러 차례의 해외 생활, 전원 이주까지 이어지는 큰 결정을 실천하는 데 배우자의 역할도 중요했겠군요.
▶(웃음) 그렇죠. 이런 선택은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아내도 이탈리아와 미국 생활을 함께했고, 살던 집을 정리하고 전원으로 옮기는 과정에도 동의해주었습니다. 경제적으로 불안할 때도 있었지만 서로 믿었기 때문에 갈 수 있었습니다. 이모작의 80%는 배우자와의 협의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경력전환 연구자 허미니아 이바라는 그의 저서 ‘워킹 아이덴티티(Working Identity)’에서 성공적인 전환은 완성된 미래를 설계한 뒤 단번에 옮겨가는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배우자와 같은 핵심 동행자와 새로운 일을 계획하고, 사람과 공간을 만나며 경험의 의미를 해석하고 실천하는 과정에서 ‘다음의 나’가 만들어진다는 것. 그런 점에서 그의 이모작은 단순한 명퇴나 귀촌이 아니었다. 미국에서 안목을 넓히고, 붓을 들어 작가 정체성을 되찾고, 귀국해서는 그 삶을 지속할 전원의 시간과 공간을 마련하는 단계적 실천 과정이었다.
-전원으로 이주한 뒤 작품 세계도 달라졌습니까.
▶그림에서 확실하게 달라졌다고 말할 정도는 아직 아닙니다. 대신 전에는 잘하지 않던 사진을 많이 찍습니다. 바다와 하늘,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식물을 자꾸 찍게 됩니다. 언젠가는 여기서 찍은 이미지를 작업에 활용해 볼 생각입니다.
-이곳은 전원주택지로 조성된 곳인데, 실제 살아보니 생활의 장점과 불편은 무엇입니까.
▶이 마을에는 한국수력원자력과 울주군이 지원하는 체육·문화 프로그램이 잘 갖춰져 있습니다. 재래시장의 채소와 과일도 신선하고 값이 싼 편이고요. 해운대까지 자동차 전용도로로 25분가량 걸리고 동해선의 서생역도 가까이 있으니 대도시와 가깝습니다. 다만 대중교통을 놓치면 오래 기다려야 해서 시간을 잘 맞춰야 합니다.
-퇴직 후 수입이 줄었는데 경제적으로는 문제없나요. 이러한 전원생활을 누구에게나 권할 수 있을까요.
▶저희 부부는 약간의 공무원연금이 있고, 강의료와 원고료, 미술품 복원에서 수입이 생깁니다. 그런데 이곳에 오니 지출은 줄더군요. 아무래도 사람을 덜 만나니까 술값이나 외식비가 3분의 1 이상 줄어요. 전원주택 생활은 혼자서도 잘 지내거나 자기 할 일을 잘 찾는 사람에게 맞는 것 같습니다. 저희처럼 자기 콘텐츠가 중요한 사람에게는 좋은 생활이죠. 다만 경제적 기반과 함께 무엇보다 배우자와 충분히 합의해야 합니다.
-선생님의 많은 경험은 인생이모작에서 어떻게 연결되고 있나요.
▶직장에 들어가면서 미뤄두었던 화가의 꿈을 퇴직 후 다시 시작한 것이죠. 거기에 미술관에서 18년 동안 쌓은 안목과 글쓰기, 해외에서 배운 복원 기술이 더해졌습니다. 지금은 전원생활을 하며 그림을 그리고, 부산미협 80년사 등 집필 활동도 하고 있어요. 강의와 미술품 복원도 하면서 그 경험들을 제 방식으로 확장하고 있죠. 그간의 경험을 보태 더 넓은 삶을 만들어가는 셈입니다.
-그렇다면 아직 남아 있는 인생 과제는 무엇인가요.
▶그동안 쌓은 경험을 공공미술관 운영에 적용해보고 싶습니다. 2014년 한·아세안 특별전을 준비하며 맺은 동남아 미술계와의 인연을 살려, 부산을 한국과 아시아 미술이 만나는 교류의 거점으로 만들고 싶어요. 이를 오늘의 K-컬처 흐름과 연결한다면 부산 문화에도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고 봅니다.
이상수의 삶에서 우리가 눈여겨볼 것은 230여 평의 전원주택이나 그가 다녀온 세계적인 미술관이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퇴직을 단순한 쉼의 시작으로 삼지 않고, 오랫동안 유보해 두었던 꿈을 복원하는 시간으로 바꾸었다는 점이다. 일모작에서 축적한 전문성, 해외에서 넓힌 시야, 다시 잡은 붓, 전원에서 되찾은 생활의 리듬이 유기적인 생활양식을 이룬다. 인생이모작은 과거를 버리고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일만은 아니다. 일모작에서 얻은 경험으로 오래 미뤄둔 자신을 다시 살려내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남는 질문은 어디에 집을 지을 것인가가 아니다. 남은 시간을 무엇에, 어떤 방식으로 배치할 것인가이다. 이상수의 캔버스는 지금부터 시작이다. 그는 여전히 현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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