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로쟈 이야기에 덧대어 얘기한 '간서치'(看書痴·책만 보는 바보)를 두고, 주위 분이 그러더군요. "책만 읽는 바보는 바보다"라고요. 목적 없는 책읽기를 꼬집고 있었던거죠. 정보홍수 시대에 무슨 다독 타령이냐, 책이 결코 밥이 아니지 않느냐, 뭐 이런 논리였죠. 실학자 박제가(朴齊家)가 놀고 먹는 유생들을 '좀벌레'라고 힐난한 사례까지 들추더군요.

수긍이 가는 면도 있었지만, 반론을 제기하고픈 부분이 더 많았지요. '목적없는 책읽기'가 있을까요? 철학적 사변을 논하는 게 아닙니다. 말 자체가 성립되지 않을 것 같아 하는 얘기입니다. 목적이 없으면 책이 손에 붙어 있질 않겠지요. 그런 책이 읽힐 리도 만무하고요. 억지로 아이들에게 밥 퍼먹이듯 책을 읽히지 않는 이상, 책을 들고 하릴없이 시간을 잡아먹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덕무 이야기를 조금만 더 해볼까요. 그의 자서전 격인 '간서치전'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두보를 좋아해서 끙끙 앓는 것처럼 골똘하여 읊조렸다. 그러나 심오한 뜻을 얻으면 너무 기뻐서 일어나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는데, 그 소리가 마치 갈가마귀가 깍깍대는 것 같았다…'.

독서의 희열이 그려집니다. 그 무엇을 해서 이런 즐거움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매월당 김시습의 책 사랑도 짚어볼만 합니다. 그가 쓴 '도서명(圖書銘)'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내가 가진 책만이 오직 나의 벗이라네(我圖我書 惟我之友)'. 책만한 친구가 없다는 말이지요. 실제 매월당은 친구가 별로 없었고 서거정이 유일한 마음의 벗이었다고 전합니다. 그가 책을 친구 삼아 빚어낸 '금오신화'는 얼마나 찬란합니까.

퇴계 이황의 그윽한 '독서삼매'도 음미할만 합니다. '도산잡영'에 '산당야기(山堂夜起)'라는 시가 있는데, 운치가 가득합니다. 모두 잠들어 산이 텅 빈듯 고요합니다. 잠들지 못하는 도산서당의 한 밤. 퇴계는 문득 일어나 등불의 심지를 돋웁니다. 좌정하여 옷깃을 여미고 읊은 한 싯구가 이러합니다. '책 가운데 참맛이 있네(書中有眞味)'. 그러면서 퇴계는 아득히 먼 곳의 학 울음소리를 듣습니다.

선인들의 독서벽(癖)을 대하노라면 희열이 손에 만져질듯 흐뭇합니다.

하다면, 우리는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막무가내로 진짜 '바보처럼' 읽을 수야 없지요. 조선시대와 지금은 독서환경이 다르니까 책읽기도 달라야 한다고요?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통하는 것은 '미치지 않으면' 다가갈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不狂不及(불광불급)이란 말이 사무칩니다. '미쳐야 미친다'(정민, 푸른역사)란 책의 한 구절을 인용해 놓겠습니다. '…광기로 비칠 만큼 정신의 뼈대를 하얗게 세우고, 미친 듯이 몰두하지 않고는 결코 남들보다 우뚝한 보람을 나타낼 수 없다'.

'책은 많고 인생은 짧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인생은 짧지만 읽을 책은 많다'고 말하는 편이 어떻습니까. 동의 하신다면, 어딘가에 밀쳐두었던 책을 '건듯' 펴 희열을 찾아보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