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상이 하고 싶은 말 무엇일까"
- 근대사 아픔 색다르게 풀어내
- 23일까지 일터소극장서 공연

'소녀상이 깨어난다면 어떤 말을 꺼내놓을까'

지난해 말 시민의 힘으로 부산 동구 초량동 일본영사관 앞에 자리 잡은 소녀상은 지금까지 한순간도 평안하지 못했다. 철거를 요구하는 일본과의 갈등은 지속 중이고, 침묵하고 방관했던 정치권·행정과 시민들의 대치도 꾸준했다. 테러에 시달리는 가운데서도 꽉 다문 표정으로 정면만 응시할 뿐인 소녀상이 깨어난다면, 어떤 이야기를 시작할까. 손 한번 잡아주고 싶었던 사람들의 바람도 실현될 수 있을까.

극단 일터가 30주년을 기념해 만든 두 번째 연극 '악사와 소녀' 공연 모습. 극단 일터 제공

이같은 상상과 염원을 바탕으로 한 연극이 무대에 오른다. 극단 일터의 30주년 기념공연 '악사와 소녀'가 오는 23일까지 일터소극장(동구 범일동)에서 초연한다. 일터의 극작가이자 연출가 김기영 씨가 작품을 쓰고 연출을 맡았다. 김선관 박성혜 배문수 윤순심 조기정 진선미 등 부산의 베테랑 배우들이 출연한다.

'악사와 소녀'는 중앙동 40계단에 있는 아코디언 악사상, 뻥튀기 장수상, 전차 운전수상 등의 동상이 깨어나 소녀상과 만나는 설정으로 출발한다. 40계단 인근을 지키며 부산근대사의 모습을 보여주는 이들 동상은 근처에 새로운 동상이 설치되면 3일 간의 자유를 얻을 수 있다. 깨어난 소녀상은 열여섯에 일본으로 떠나 결국 돌아오지 못했던 고향집을 찾아가길 원하고, 악사상은 소녀상의 여정을 돕는다. 관객은 소녀와 주변 인물을 통해 그들이 겪었을 아픔은 물론 현재 세대와의 소통까지 생각하게 된다.

김기영 연출자

김기영 연출자는 "중앙동 40계단 인근에 2년 동안 살면서 동상들을 볼 때면 늘 시간여행을 하는 기분이었다. 작품으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줄곧 해왔는데, 마침 소녀상이 마음에 들어왔고 이들 동상과 만났다. ㈔부산민예총 활동을 하며 매주 토요일 열리는 소녀상지키기 문화운동에 참여했는데, 소녀상을 닦고 어루만지는 시민들을 보며 소녀가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궁금했다"고 기획의도를 밝혔다.

이어 김 연출자는 "'치유'라는 메시지는 감히 다루지 않기로 했다. 그저 소녀상이 손을 내밀고, 시민들이 손을 내밀며 연대하는 마음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작품에는 세 명의 여성이 나온다. 흩어져 있는 이들의 이야기가 엮이면서 메시지를 전할 것"이라며 "소녀상을 통해 떠올리거나 기대하는 선입견에서 벗어나려 했다. 많은 사람이 그런 이야기는 하고 있으므로, 나는 다른 관점에서 접근하려 했다"고 설명했다.

이번 '악사와 소녀'는 극단 일터의 30주년 공연 중 두 번째 작품이다. 지난 4월 김선관 대표의 연출로 '동희호태'를 마쳤고, 초연으로 이번 작품을 마련했다. 원래는 김기영 연출자가 죽음과 관련한 작품을 준비했으나, 연초에 일터 동료 두 명이 잇따라 세상을 뜨는 일을 겪으며 '악사와 소녀'를 새로 썼다. 김 연출자는 "동료를 잃고 원래 계획했던 작품을 도저히 써나갈 수가 없었다"며 "마음을 추스르고 이번 '악사와 소녀'를 다시 준비했다"고 말했다.

극단 일터는 '악사와 소녀' 이후에도 30주년 공연을 이어간다. 가을에 노래패 콘서트를, 겨울에는 요산 김정한 선생의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일제강점기 백성의 삶과 각성을 담은 '회나뭇골 사람들'을 국립부산국악원 연악당에서 선보인다. '악사와 소녀'는 수요일부터 일요일까지 평일 오후 8시, 주말 오후 5시에 공연한다. 일반 2만 원, 초중고 1만5000원. (051)635-5370

안세희 기자 ahnsh@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