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5부터 2000년 작고 때까지
- 부산 구심점으로 영남예술 육성
- 지역 작곡가 여러 모임 꾸리고
- 후학 악단·합창단 결성도 주도
- 남다른 애정 쏟은 ‘프로 무지카’
- 부산대 제자 연주 활동 길 틔워
- 평론계 활성화 위해 책 펴내고
- 중학음악 국정교과서 편찬까지
- 본지에 연주시설 촉구 기고도
한국전쟁 기간 임시수도이던 부산에 정부의 임시청사들만 자리 잡은 게 아니었다. 서울 소재 대학들도 부산에 둥지를 틀었고, 문화예술인 역시 부산으로 밀려들었다. 부산은 정치·행정의 임시수도였을 뿐만 아니라 문화예술의 임시수도였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1950년대 초반 부산은 문화예술 영역에서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는 외부에 힘입은 것만은 아니었다. 내부의 역량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음악계도 마찬가지. 이 무렵 부산에는 작곡가이자 음악교육가 금수현(1919 ~1992)이, 훗날 다작의 작곡가로 등극한 이상근(1922~2000)이 있었다. 1950년부터 1970년대 후반까지 부산 음악의 ‘여명기’에 이상근은 작곡가로 활발한 대외 활동을 하고 대학교수로서 음악인 후학 양성에 온 힘을 기울였다. 이상근은 한국전쟁 이후 2000년까지 부산을 떠나지 않고 부산 문화예술의 성장과 함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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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대 학생과 교수로 구성된 실내악단 프로 무지카의 연주회(왼쪽)와 부산대 사범대학 음악교육과 정기연주회. 두 연주회 모두 이상근이 지휘를 맡았다. |
■‘영남악파’를 새겨 두다
예향인 경남 진주 출신으로 경남 마산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이상근이 부산에서 본격적으로 활동한 것은 1953년부터다. 윤이상(1917~1995)의 후임으로 부산고교 음악교사를 맡은 시점이다. 앞서 1952년 이상근은 부산의 이화여대 피란교사의 천막 강당에서 제2회 작곡발표회를 열었다. 이 발표회는 이상근 자신의 표현처럼 “한국 음악사상 최초의 개인 실내악 작품들을 선보였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그가 작곡가로서 행보를 더욱 본격화한 출발선이었다. 이상근은 1955년 새로 문을 연 국립부산사범대학(2년제)에 교수로 재임하면서 대외적인 활동에 박차를 가했다. 1958년 5월 12일 시립서울교향악단의 연주로 ‘이상근 관현악의 밤’이 열렸다. 관현악곡만으로 구성된 이례적인 연주회였다. ‘작곡가 이상근’을 ‘서울 무대’에 널리 알렸다. 당시 연주된 ‘교향곡 제2번’은 완결된 4악장 체계를 갖춘 최초의 교향곡 연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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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근이 편찬한 음악교과서(왼쪽) 및 동인지 ‘윤좌’의 표지. |
작곡가로서 이상근의 명성은 1959·60년 미국 테네시주 조지 피바디 사범대학 연수와 탱글우드 음악제 수학 기회로 이어졌다. 1년간의 피바디 연수와 탱글우드 음악제는 이상근이 현대음악을 접하면서 새로운 창작의 열의를 품는 자극제가 됐다.
이상근은 부산을 음악 인생의 구심점으로 삼았다. 그는 1958년 창립된 작곡가 단체 ‘창악회’에서 활동하며 부산 음악가의 대표로 ‘중앙’의 음악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동인지 ‘윤좌’의 활동을 통해 부산의 사회 인사,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지역 문화예술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이상근은 활동 무대를 부산은 물론 경남 마산과 대구 등 영남지역으로 넓혔다. 그는 ‘영남악파’뿐만 아니라 한국 현대음악을 이끌어간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인 것이다. 특히 1986년 초연된 오페라 ‘부산성 사람들’을 비롯한 이상근의 작품들은 부산의 음악 예술을 대표하는 ‘얼굴’이 됐다. 최근 ‘부산 예술인 아카이빙전(展)’에서 이상근 섹션을 맡은 지역인문콘텐츠연구소는 “이상근은 부산 음악문화의 터전을 마련하고 음악교육과 공연문화를 이끌어간 크나큰 스승이었다”고 평가했다.
■‘프로 무지카’에 큰 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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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근이 쓴 국제신문 제정가요 ‘내사랑 하루는’의 악보. |
이상근은 1958년 최인찬, 함사순, 유신, 최덕해 등과 작곡가 모임인 ‘Group A’를 결성했다. 작곡가들이 활동할 공간 마련이 취지다. 이는 1974년 향신회 창립으로도 이어진다. 그 해 부산대 사범대학 음악교육과 신설과 함께 교수로 취임한 뒤 창작계에 활기를 불어넣으려는 차원에서 제자들로 구성된 향신회를 꾸렸다. 향신회는 창작 활동과 발표회, 신인작품 공모, 세미나 개최 등으로 대중적인 보폭을 넓혔다. 이상근은 대학 연주단체의 결성도 주도했다. 효성여대 합창단, 부산대 사범대학 합주단, 프로 무지카(Pro Musica) 등이 그것이다.
1982년 5월 창단 연주회를 연 부산대의 프로 무지카는 의미가 남다르다. 이상근의 실내악에 대한 간절한 바람이 구체화된 것이다. 프로 무지카에는 대학 1학년생부터 강사와 교수진까지 함께했다. 학생들이 연주 활동에 참여할 길을 열어줬다. 프로 무지카는 정기연주회를 통해 다양한 레퍼토리를 선보였다.
이상근은 프로 무지카와 관련한 글에서 “프로 무지카는 부산대의 음악적인 얼굴임을 자처한다. 필자가 퇴임할 때까지 작곡에의 집념 이상으로 프로 무지카 지도에도 보람을 느끼고 있음을 고백해도 좋을 것 같다”고 밝혔을 만큼 열정과 애정을 쏟았다.
음악 교과서 발간도 이상근의 업적에서 빼놓을 수 없다. 1954년 윤이상과 함께 ‘국민학교 음악지도서 Ⅰ-제1·2학년용’(새로이출판사)를 펴냈다. 이상근이 1967년 영지문화사를 통해 펴낸 ‘중학음악 1’과 ‘중학음악 2’는 1978년 국정교과서로 출판되기도 했다. 이는 당시 검인정교과서의 난립 속에 이뤄진 성과여서 주목된다. 이 외에도 1979년 규문각에서 펴낸 ‘음악: 교사용 지도서’와 ‘음악’ 교과서도 있다. 기악과 합주를 지향한 이상근의 음악교육관은 교육현장에서 채택된 음악 교과서와 교사용 지도서에 고스란히 담겼다. 이러한 이상근의 음악 교과서 발간에는 미국 음악교육 현장에서 직접 접한 경험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 문필 활동·사가 등 작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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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갑 기념공연에서의 이상근. |
“지방에 있다고 해서 작품 활동에 지장을 받은 적은 전혀 없습니다. 초창기에 부산 음악계가 낙후되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제는 중앙무대 못지않게 모두들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단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부산 음악계에 연주만 있지 평론이 아직 정착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상근이 창악회를 통해 서울에서 작곡 활동을 하던 무렵 쓴 글이다.
그래서 이상근은 지휘봉 대신 펜도 많이 들었다. 비평과 평론, 음악 해설 등으로 대중과 소통했다. 학술적인 저술 활동에도 나섰다. ‘현대음악과 그레고리오 성가’, ‘우연성(불확실성) 기보법에 관한 시론’, ‘미국의 현대음악-찰스 아이브스와 존 케이지를 중심으로’ 등을 들 수 있다. 부산 동인지 ‘윤좌’의 활동, 매체를 통한 비평과 평론을 통해 자신의 음악관과 창작관을 드러냈다. 1974년 부산시민회관이 들어서기 이전 변변한 연주회장 하나 없던 지역의 현실을 바꿔보려고 국제신보(지금의 국제신문)에 이상근이 쓴 글이 눈에 띈다. 1961년 1월 14일 자에 실린 ‘최초의 민선시장에게’이다. 지면을 통해 문화회관의 청사진을 제시했다. “이천 명 내외의 좌석을 가지고 알맞은 음향설비, 그리고 오륙십 명의 연주에 지장 없을 무대, 또 꼭 필요한 연주회용의 대형 ‘피아노’만 구비된다면 문화도시 부산의 면목에 손색이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상근은 각 단체와 회사, 학교 측의 요구에 따라 많은 곡을 쓰기도 했다.국립교향악단(현 KBS교향악단) 창립 20주년을 기념해 ‘축전서곡’을, 문화방송 창사 30주년 기념해 ‘신정-희망’을 썼다. 또 이상근은 국제신문 제정가요 ‘내 사랑 하루는’과 ‘국제신문 사가(社歌)’, 부산대의 ‘사대가’와 ‘교양학부 찬가’, 부산수산대(현 부경대)의 ‘바다의 아들’, 부산문화방송의 ‘HLKU의 노래’, 부산시 제정 ‘시민의 노래’와 ‘자유의 항구’를 비롯해 ‘부산은행 사가’, ‘PSB(현 KNN) 사가’ 등을 작곡했다. 교가도 많이 남겼다. 동아대 동의대 금성고 낙동고 남성여고 덕문여고 동인고 부산외국어고 중앙여고 중앙고 충렬고 등이다.
글=오광수 기자 inmin@kookje.co.kr
사진=지역인문콘텐츠연구소 제공
공동기획: 국제신문·(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