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상춘 작가·김원석 감독에
- 제작비 600억·제주 배경 등
- 아이유와 박보검 출연까지
- 제작단계부터 화제 몰고다녀
- 부모세대에 바치는 헌사이자
- 찬란한 사랑에 관한 이야기
- 두 주연배우 물오른 연기력
- 염혜란 배우 존재감 더 엄청나
사람 사는 냄새 옴팡지게 나는 드라마다. ‘동백꽃 필 무렵’의 작가(임상춘)가 유채꽃 핀 무렵의 사랑을 신파 없이도 눈물 나게, 그럼에도 미소 짓게, 참으로 섬세하게 어루만지면서 써냈다 싶다. ‘나의 아저씨’를 연출한 감독(김원석)이 삶의 무게를 버텨내는 사람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잡아챘구나 싶어지기도 한다. 지난 7일 공개된 넷플릭스 시리즈 ‘폭싹 속았수다’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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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에서 방영되고 있는 시리즈 ‘폭싹 속았수다’의 스틸컷들. 기존 넷플릭스 드라마와 달리 4회씩 4주에 걸쳐 공개되는 방식이 독특하다.
넷플릭스 제공 |
아직 4부까지밖에 공개되지 않았는데 그 안에 벌써 세상 풍파, 애틋함, 애처로움, 사랑 등 온갖 감정이 진득하게 담겼다. 만든 사람들에게 “폭싹 속았수다(수고하셨습니다)”라고 말해주고 싶은 드라마가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임상춘 작가와 김원석 감독, 여기에 아이유와 박보검까지. 제작 단계부터 화제성을 몰고 다닌 드라마다. 600억 원이 투입된 제주도 배경 이야기라는 점에서 관심은 더 끓어올랐다. 기존 넷플릭스 드라마와 달리 4회씩 4주에 걸쳐 공개되는 방식도 눈길을 끌었다. ‘더 글로리’가 파트 1-2를 시간차를 두고 공개된 적은 있지만, 이렇게 전 회차를 주 단위로 쪼개서 선보이는 건 처음이다. 봄-여름-가을-겨울 4계절을 4개 막으로 구성해 선보이겠다는 취지다. 1960년대부터 2025년까지 이어지는 삶을 계절에 빗대겠다는 전략이다.
다만, 전 회차 동시 공개라는 넷플릭스 편성에 길든 시청자를 상대하는 데는 리스크가 없지는 않은 상황. 봄에 해당하는 4부까지 본 시점에서 평가하자면, 이 선택은 옳았다.
‘폭싹 속았수다’는 음미할수록 다양한 감상을 불러일으킨다.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한 드라마이기도 하다. 시간 텀을 둔 호흡은 시청자를 봄의 계절 안에 더 오래 머물게 한다. 더 오래 극의 의미를 곱씹게 한다. 다음 회차를 기다리는 시간이 흡사 ‘환절기’ 같아 계절의 밀도가 더 짙게 다가온다. 작품 결에 맞춘 이번 공개 전략은 넷플릭스로서도 좋은 베타테스트가 될 것으로 보인다.
■엄마에서 딸로, 다시 그 딸에게로
‘폭싹 속았수다’ 1~4회는 크게 ‘두 개의 타임라인으로 전개된다. 하나는 애순(아이유)과 관식(박보검)의 10대 모습이 그려지는 제주의 60년대. 또 다른 타임라인은 중년이 된 애순(문소리)과 관식(박해준), 그들의 딸 금명(아이유)이 살아가는 서울의 90년대다. “치열하게 살아오신 조부모님, 부모님 세대에 대한 헌사이자, 앞으로 이 세상을 살아갈 자녀 세대에 대한 응원가와 같은 작품이 되었으면 했다”는 김원석 감독의 말마따나, 남녀의 단순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서로의 곁을 지키며 살아 낸 가족의 희생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이 뭉클한 서사의 출발점에 해녀 전광례(염혜란)가 있다. 전쟁통에 제주까지 흘러들어온 광례는 물질을 배워 먹고 산다. 새 삶을 살게 해준 고마운 바다다. 그러나 첫 번째 남편을 삼켜버린 바다이기도 하다. 남편이 죽자 어린 딸 애순(김태연/아이유)을 시댁에 두고 새살림을 차렸지만, 두 번째 남편 염병철(오정세)은 빈대 같은 한량이다. 염병철과의 사이에서 얻은 두 아이도 광례가 먹여 살려야 하는 상황. 독하다는 소릴 들으면서도 그녀가 물질을 멈추지 않는 이유다.
“내 팔자가 지게꾼이라”고 자조하는 광례에게도 그 지게를 나눠 들겠다는 고마운 존재가 있다. ‘점복 팔아 버는 백환. 내가 주고 어망 하루를 사고 싶네’라는 시를 쓰는 요망진 딸 애순이다. 그런 딸이 어미 없는 집에서 식모살이한다는 소식에 광례는 시댁에서 애순을 데려온다. 기쁨도 잠시. 남편을 집어삼킨 바다는 그녀에게도 혹독하다. 해녀들이 걸린다는 ‘숨병’에 걸린 광례는 죽음을 기다리며 애순에게 유언과도 같은 말을 남긴다. “부모가 먼저 죽어도 살면 살아진다”고.
광례의 바람과 달리, 기구한 운명은 딸에게 대물림된다. 졸지에 고아가 된 애순은 새아빠 집을 못 떠나고 식모살이를 한다. 다행히 그런 애순 옆에 ‘볼 빨간 소년’ 관식(이천무/박보검)이 있다. 애순 앞에만 서면 관식의 볼엔 봉숭아 물이 든다. 그래서 놀림받지만, 관식은 애순 곁을 계속 맴돈다.
별도 달도 따다 줄 순 없지만, 애순이 배곯지 말라고 조기를 챙겨준다. 문학소녀를 꿈꾸는 애순을 대신해 시장 좌판에서 양배추도 팔아준다. 조오련 같은 유명한 수영 선수는 못됐지만, 애순이 있는 곳을 향해서라면 물개처럼 헤엄쳐 간다. 그것은 관식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사랑. 아니, 그 어떤 사랑보다 찬란한 그만의 사랑법이다. 그런 관식과 애순이 부부가 되고 부모가 되기까지 과정이 4회까지 촘촘하게 그려진다.
‘폭싹 속았수다’에서 가난 못지않게 비중 있게 다뤄지는 건, 여성을 억압하는 공고한 가부장제다. “제주서 여자로 태어나느니 소로 태어나는 게 낫다”는 대사가 이를 대변한다. 학교에서 100점을 받아와도 애순은 “여자가 대학 가서 뭐 하느냐”는 소리를 듣는다. 관식과 야반도주 후 붙잡혔을 땐 여자라는 이유로 더 엄격한 벌을 받는다. 결혼 후엔 아들을 낳지 못한다고 또 구박받는다.
그 누구보다 가부장제의 피해자였을 며느리들이, 시어머니가 되자 며느리를 타박하는 게 안타깝다. 사람이 나빠서가 아니다. 시대가 그러해서다. 그런 시대 속에서 어미가 자신을 지켰듯, 애순 또한 딸 금영을 지켜내려 부단히 애쓴다. 엄마에서 딸로, 다시 그 딸에게로 이어지는 ‘내리사랑’이 눈물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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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싹 속았수다’의 스틸컷들. 넷플릭스 제공 |
■귤차 같은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에서 아이유는 젊은 애순과 애순의 딸 금명을 동시에 연기한다. 철부지 소녀 애순부터 억척 엄마 애순까지 커버하는 점에서 연기 난도는 더 높았을 텐데, 그 간극을 유연하게 수습해 낸다. 엄마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여성들도, 한땐 누군가의 딸이고 꿈 많은 소녀였음을 일깨운다. ‘나의 아저씨’ ‘브로큰’(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등에서 선배들과 호흡하며 얻었을 연기에 대한 생각과 자신감도 한층 물오른 느낌이다.
박보검이 연기한 관식은 뿌리 깊은 가부장제의 시대에 돌출돼 나온 판타지 같다. 그 시대는 물론, 2025년에도 먹힐 남편상이다. 그런 관식은 박보검을 통과하며 설득력을 획득한다. 사랑 앞에서 눈물 질질 짜던 관식의 어깨가 처자식을 건사하기 위해 애처롭게 굽어가는 모습에선, 박보검이라는 배우의 스펙트럼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넓다는 걸 확신하게 된다. 청춘의 대명사 같았던 배우의 성장을 바라보는 건 흐뭇한 일이다. 박보검은 이 드라마를 통해 배우로서 새로운 분기점을 맞을 것으로 보인다.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또 한 명의 배우. 광례를 연기한 염혜란이다. 1회에만 등장했지만, 존재감이 너무나 커서 ‘폭싹 속았수다’의 근원처럼 느껴진다. 내뱉는 대사 마디마디가 어찌나 서글픈지. 그러면서 또 얼마나 강인한지. 장면을 훔치는 연기가 무엇인가를 온몸으로 증명해 보인다. 좋은 의미에서 괴물 같은 배우다.
‘폭싹 속았수다’의 영어 제목은 ‘When Life Gives You Tangerines(인생이 귤을 준다면)’이다. 제주도 사투리가 담긴 원제를 고스란히 대체할 단어를 찾기가 쉽지는 않았을 터. 이 어려운 미션을 제작진은 미국 철학자 엘버트 허버드가 남긴 격언, ‘When life gives you lemons, make lemonade.(인생이 레몬을 주면 레모네이드를 만들어라)’에서 힌트를 얻은 듯하다. 역경을 만났을 때 긍정적으로 극복하라는 의미의 경구다.
‘폭싹 속았수다’는 레몬을, 제주도 특산물인 감귤로 바꿨다. ‘폭싹 속았수다’가 지향하는 삶의 의미를 잘 담아낸 영어 제목이자, 제주도를 담아낸 제목인 동시에, 해외 시청자를 공략하기에 영리한 제목이다. 이 귤차 같은 드라마가 보여줄, 여름과 가을 그리고 겨울 이야기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