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라마 보다 감정 주체 못해
- 임상춘 작가에게 장문 메시지
- “기회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 제가 저밖에 안돼 죄송합니다”
- ‘나의 아저씨’에서 지안이가
- 그늘에서 볕으로 나왔다면
- 애순은 그늘에 굴하지 않고
- 다시 햇볕을 찾아내는 인물
“봄 한 송이, 여름 한 컵, 가을 한 장, 겨울 한 숨.”
아이유가 ‘겨울잠’(2021)에서 표현했던 4계절이다. 스물일곱에 스케치해서 스물아홉에야 완성됐다는 이 곡의 가사를 보며, 그녀가 살면서 겪은 몇 번의 크고 작은 상실과 이별을 참으로 ‘곱게, 어여쁘게, 애달프게, 그리고 눅진하게’ 담아냈다고 생각했었다.
음악으로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이야기했던 아이유가 30대가 돼서 연기로 4계절을 다시 한번 크게 통과했다. 오르락내리락하는 인생사를 사계절에 빗댄 넷플릭스 시리즈 ‘폭싹 속았수다’를 통해서다. ‘폭싹 속았수다’에서도 아이유는 ‘곱게 어여쁘게 애달프게 눅진하게’ 1951년생 애순과 그녀의 딸인 1968년생 금명을 1인 2역으로 소화했다.
‘폭싹 속았수다’가 모두 공개된 후 서울 중구의 호텔에서 만난 아이유는 여전히 드라마가 그녀의 인생에 안긴 여진을 강하게 느끼고 있는 듯했다. “촬영하면서도 힘든 적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드라마를 열렬히 사랑해 주시니 너무 행복하다”고 벅찬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부모 세대 위한 헌사… 큰 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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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시리즈 ‘폭싹 속았수다’에서 애순과 그녀의 딸 금명을 1인 2역으로 소화한 아이유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넷플릭스 제공 |
‘폭싹 속았수다’는 ‘쌈, 마이웨이’ ‘동백꽃 필 무렵’ 등으로 대중성과 작품성을 동시에 거머쥔 임상춘 작가의 작품이다. 이번 작품은 임상춘 작가가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한층 깊어졌다는 평을 받는다. ‘폭싹 속았수다’를 보면서 눈물 콧물 쏟았다는 후기가 SNS에 넘친 것도 이런 이유. 배우이기 이전에 시청자이기도 한 아이유 역시 다르지 않은 듯했다. 글 작업에 방해가 될까 봐 작가들에게 연락하는 걸 참아내 온 아이유지만, 이번 드라마에서는 그럴 수 없었단다.
11부까지 보고 터져 나오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서 임상춘 작가에게 “초장문의 글을 읽게 해서 죄송합니다”로 시작하는 메시지를 보냈다는 아이유. 문자의 9할은 감사함. 1할은 죄송하다는 말이었다. “내가 나라서 이런 기회를 주신 게 너무 감사하면서도, 내가 나밖에 못 돼서 죄송했다. 이렇게 큰 판에서 놀아보게 해 주셔서 감사하고 여한이 없다는 마음과, 이렇게 좋은 기회를 주셨는데 더 잘하지 못해서 아쉬운 마음에 그런 문자를 보냈다”며 작품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폭싹 속았수다’는 광례(염혜란) 애순 금명으로 이어지는 모녀들의 서사다. 그러나 여성 서사 외에도 여러 다양한 삶의 층위를 품고 있다. 아이유 역시 “많은 이야길 담고 있어서 하나로 정의하기 어려운 드라마”라며 “그럼에도 가장 중요했던 건 ‘살면 살아진다’는 말이 아니었나 싶다. 가족과 여성 이야기, 시대와 세대를 뛰어넘는 이야기, 사랑 이야기, 성공에 대한 이야기가 드라마에 나오지만, 결국 핵심은 ‘살아라’였다. 관식(박보검·박해준)이 떠난 후 애순은 외로움을 온전히 다 겪지만, 그런 상황에서 다시 고개를 들고 허리를 펴고 책상 앞에 앉아 시를 마저 다 쓰지 않나. 관식이 떠난 후에도 애순이는 또 살아갔다,를 보여줘서 엔딩이 참 좋았다”고 부언했다.
김원석 감독은 드라마 공개 전 “부모 세대에게 보내는 헌사”라고 소개한 바 있는데, 그 말은 거를 타선이 하나도 없는 사실이었다. 드라마에는 부모 세대의 헌신과 그런 부모들에게 ‘서운했던 것만 사무치는’ 자식들의 마음이 빼곡하게 담겨 있다. 부모님에게 “짜증 나”라는 말로밖에는 고마움을 표할 길이 없었던 서툰 자식들의 마음까지도.
“‘짜증 나’라는 대사는 정말이지, 하이퍼리얼리즘인 것 같다. 나도 그 말을 부모님에게 종종 썼던 것 같다. 최근에 아빠가 몸이 안 좋으셨는데, 그런 몸으로 집에 와서 청소를 해 주시더라. 그 앞에서 ‘짜증 나!’라는 말이 나왔다”고 웃어 보이며 “내 마음은 고마움이고 사랑인데, 한 성대로 그 모든 말을 꺼낼 수 없어서 괜히 ‘짜증 나’가 튀어나왔다. 그런데 그걸 부모님은 ‘사랑해’라는 말로 정확하게 통역해서 들으신다. 임상춘 작가님이 그런 자식의 마음을 잘 알고 대사로 써주신 게 아닐까 싶다.”
‘폭싹 속았수다’는 ‘나의 아저씨’를 함께 한 이원석 감독과 아이유의 만남으로도 화제가 된 바 있다. 특히나 ‘나의 아저씨’로 배우로서의 인생에 터닝포인트를 맞았던 아이유가 ‘폭싹 속았수다’로 또 한번 배우로서 확장됐기에 두 작품을 연결해서 바라보는 시선이 있다. 이에 대해 아이유는 “‘나의 아저씨’의 지안이라는 인물은 그늘로 시작해서 볕으로 나오는 인물이었다. 반면 애순이는 볕에서 시작해서 여러 그늘을 만나지만 거기에 굴하지 않고 인간이 지닌 생명력을 동력 삼아 다시 햇볕을 찾아 나오는 인물”이라며 “그동안 지안이처럼 어둠을 가지고 있는 역할을 많이 맡았기에, 애순을 더 연기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음악과 연기로 더 단단해진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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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폭싹 속았수다’의 한 장면. 넷플릭스 제공 |
드라마 말미에 문학소녀를 꿈꾸던 애순은 그토록 원하던 시집을 출간한다. 누군가에겐 ‘고작 시집 한 권’일 수 있지만, 누군가에겐 삶을 잘 살아낸 증거처럼 다가온다. 아이유는 “성공한 삶이란 뭘까를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었다”며 “나도 인간적으로 욕심이 많다. 그런데 그런 욕심을 다 이룬 삶이 최고로 성공한 삶일까? 그걸 이루기 위해 느껴야 할 감정을 못 느끼고, 사람들과 어울려야 할 때 못 어울리고, 감정을 충분히 소화 시키지 못하고 빨리 넘겨버린다면 과연 좋은 삶일까 싶었다. 그보다는 애순처럼 ‘내 인생이 시집 한 권 같았어. 한 장도 허투루 쓴 게 없어. 이게 내 보물이야’라고 말할 수 있는 삶이 진짜 잘 산 삶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인생을 ‘폭싹 수았수다’라는 제목의 시집에 담아낸 오애순처럼, 아이유가 20·30대의 자신의 삶을 담은 시집을 낸다면 어떨까. 문득, 시집에 어떤 제목을 붙이고 싶을지 궁금했다. “‘다시 연필을 깎겠습니다’라는 제목이 생각났다. 나름 치열하게 쓰고 반추하며 20대를 지냈다는 생각이 드는데, 30대가 되면서 날카로웠던 연필심이 조금 뭉툭해졌다는 느낌을 받는다. 지금 시점에서 재정비해 보고 싶다”고 말했다.
이 대목에서 아이유는 자신이 걸어 온 지난 삶을 돌아봤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20대에는 일 말고는 재미있는 게 없었다. 나름대로는 내 인생에 건설적인 도움이 됐다고 합리화했지만, 어떻게 보면 즐거움만을 좇은 것일 수도 있다. 다행히 많은 분이 ‘쟤는 참 성실하구나’라고 좋게 봐주신다. 다만 ‘내가 그때 조금 더 나를 돌아보고 점검했다면 더 나은 가사를 썼겠구나, 더 나은 연기가 나왔겠구나’ 하는 아쉬움이 있다. 연필을 다시 깎겠다고 말씀드린 것도 이런 이유다. 와다다다 달려나가기만 해서 뭉툭해져 있는 연필심을 다시 깎겠다는 다짐이다.”
아이유에게 음악과 연기는 따로 떨어진 활동이 아니다. 음악이 연기를 더 도톰하게 살찌우고, 연기를 하며 얻은 삶의 지혜가 음악에 침투해 노래를 더 단단하게 한다. 지난해 2월 발표한 노래 ‘Shh..’가 바로 그 상징이다. “‘Shh..’ 완성에 ‘폭싹 속았수다’ 영향이 매우 컸다. 마음속에서 늘 맴돌던 테마였지만, ‘폭싹 속았수다’를 만나지 않았다면 좀 더 나중에 곡이 완성되지 않았을까 싶다. 정말 멋진, 그리고 이해할 수밖에 없는 여러 여성상을 드라마를 통해 만나면서 그런 것들을 담은 가사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너무 따뜻하기만 한 사운드보단 강인한 사운드가 들어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가사를 매만졌다.”
아이유를 만나고 나오면서 여성들의 연대가 그려진 ‘Shh..’를 찾아 다시 들었다. “뒷짐을 진채 /따라갈래 /그녀의 긴 발자국/서로를 이어 (서로를 이어)/How special we are (special we are)” 아이유가 새로 깎은 연필심으로 또 어떤 노래와 연기를 써 내려갈지, 그 모습이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