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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경미 주부가 성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으로 고통받는 여자아이의 이야기를 묘사한 동화책을 아들과 함께 읽고 있다. 박수현 기자 parksh@kookje.co.kr |
무심코 읽어 온 동화책이 남녀 성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을 확산시키는 요인이라는 목소리가 제기되고 있다. 부산성폭력상담소는 여름방학을 맞아 양성불평등 해소 북스타트 운동을 실시한다. 동화책에 나타난 잘못된 성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을 벗고 아이들에게 사회구성원으로서 개성있는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다. 전문가들은 알게 모르게 강요된 성역할이 아이들의 개성을 막는 주요 요인이 된다고 입을 모은다.
●동화 속 고정관념=백설공주, 잠자는 숲 속의 미녀, 신데렐라. 이들 동화는 모두 착한 사람이 복을 받는다는 내용의 공통점을 갖고 있다. 하지만 좀 더 자세히 뜯어보면 남녀 성 역할 묘사에 있어서도 몇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여주인공은 모두 예쁘고 양육과 집안일을 도맡아 한다. 또 항상 멋진 왕자에 의해 인생의 전환을 맞게 된다. 언제나 주도적으로 인생을 개척하는 인물은 남자로 설정돼 있다. 가끔 등장하는 계모는 모두 악한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이재희 부산성폭력상담소 소장은 "대부분의 동화에서 남녀의 성격이 천편일률적으로 묘사되고 있다"며 "이같은 설정은 아이가 자신의 성역할에 대한 편견을 갖게 만든 채 세대가 바뀌도록 반복 재생산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선녀와 나무꾼, 평강공주, 콩쥐팥쥐와 같은 한국 전래동화에서도 설정은 비슷하다. 신라대 공미혜(가족학과) 교수는 "기존의 성역할에 대한 인식은 남자와 여자의 생물적 차이에 따른 관습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며 "어릴 때 접하는 동화책이나 장난감 차이에서 오는 성역할에 대한 주입이 평생을 지배한다는 점에서 동화책의 비판적 접근과 선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남자·여자라서 괴롭다?=동화 속 성역할에 대한 편견은 아이들의 생활에도 깊이 영향을 미친다. 부산성폭력상담소가 초등생 일기를 바탕으로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남자든 여자든 자신의 성역할에 대해 상당히 부담스럽게 여기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부분의 여학생들은 설거지나 청소 등 가사일을 하도록 강요받는 것에 강한 불만을 드러냈다. '왜 오빠는 가만있는데 나만 밥상을 차리고 설거지를 해야 하나' 혹은 '아침에 아빠는 늦게 일어나는데 나는 일찍 깨운다' '머리를 꾸미는 것이 싫다' '축구놀이를 할 때 꼭 남자들만 한다' 등 오빠나 아빠가 하는 행동과 비교하면서 여자인 것에 대해 불만을 드러냈다.
남자 아이들도 자신의 성역할에 부담을 느끼기는 마찬가지다. 남학생끼리 치고 받고 싸우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보거나 싸우면 꼭 이겨야 한다는 주위의 시선을 두려워했다. 한 남자 초등생은 '나보다 힘센 여자 아이와 싸웠는데 왜 남학생만 야단맞는지 모르겠다' '여자처럼 운다고 놀린다' '여자 아이들과 얘기하고 놀고 싶지만 남자는 남자대로 여자는 여자대로 놀 때가 많아서 싫다'고 일기에 쓰기도 했다.
●동화책 가려가며 읽어야=성역할 교육에 대해 관심을 가져온 주부 이경미(부산 서구 서대신동·43) 씨는 최근 11살 둘째아들에게 들려줄 독특한 동화책을 마련했다. '난 이제부터 남자다'라는 책이다. 내용은 여자 아이가 할머니로부터 성차별적인 말을 들은 후 남자 아이들의 행동을 무조건 따라하다 결국 자신의 정체성을 찾게 된다는 이야기다. 이경미 주부는 "아이가 동화책 속 여주인공의 상황에 안타까움을 표시하다 그 입장을 이해하는 것 같아 기쁘다"고 말했다.
실제로 미국 영국과 같은 선진국은 학교나 가정에서 백설공주, 신데렐라, 잠자는 숲 속의 미녀와 같은 동화를 읽히지 않은 지 오래됐다. 이들 동화의 성역할이 지나치게 편향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여전히 동화책 속 성역할 묘사의 문제점을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부산성폭력상담소가 추진하는 양성평등 북스타트 교재들은 모두 이 같은 비판적 시각으로 동화를 뒤집어 보고 남성과 여성 성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기 위한 주제로 구성돼 있다. 전업주부 아빠를 그린 '아빠의 앞치마', 맞벌이 직장 엄마를 그린 '돼지책', 여성의 외모에 대한 고정관념을 버린 '종이봉지공주' 등 6권을 교재로 사용한다. 공미혜 교수는 "편견이 아닌 개성과 특성을 존중한 성역할 교육은 어릴 때부터 이뤄져야 한다"며 "동화책을 가려가며 읽히는 것의 중요성도 여기에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