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기르던 강아지 ‘똘구’를 경북 영주의 한 가정으로 입양 보냈다. 도시보다 시골이 그 녀석이 더 살기 좋을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입양 보낼 가정을 선택하는 데 고민을 거듭했다. 동물을 하나의 생명으로 여겨야 한다는 대전제를 세웠다. 결국 부산에서 귀농한 한 가정을 선택했다. 작은 마당이 딸린 집에서 사는 은퇴한 부부가 똘구의 새 주인이 됐다. 새 주인과의 전화 통화에서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휴대전화 메신저로 한 번씩 똘구의 사진을 받는다. 건강한 모습에 마음이 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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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경북 영주로 입양 보낸 똘구(오른쪽)과 우리집 터줏대감 고양이 뻔이. |
똘구와의 인연은 우연처럼 다가왔다. 서너 달 전이었다. 부산 금정구 구서동 오시게 장터를 돌아보고 있었다. 한 할머니가 강아지를 팔고 있었다. 상자 밖에는 1만 원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별 생각 없이 지나치려다 우연히 상자 안을 봤다. 한 녀석이 상자 옆면을 기어오르고 있었다. 호기심에 허리를 굽혔다. 똘구와 눈이 마주쳤다. 깊은 검은색. 그 찰나의 순간에 홀려버렸다. 지갑을 여는 데 불과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녀석과 가족이 됐다.
우리 집에는 이미 터줏대감이 있다. ‘뻔이’라는 이름의 흰색 고양이. 이미 두 번 파양된 녀석이다. 똘구는 용감했다. 불청객을 껄끄러워하는 뻔이와 맞서 싸웠다. 엉금엉금 방을 기어 다니면서도 기죽지 않았다. 자신도 당당한 생명이라는 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몇 년 전 말티즈 한 마리를 입양한 적이 있다. ‘산도’라는 이름을 붙였다. 산도는 안락사를 앞두고 있었다. 당시 애견업계에서 일하던 친구의 동생에게 들었다. 애견센터에서 3개월 이상 팔리지 않은 강아지는 자연스럽게 안락사 수순을 밟는다고. 사실인지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죽음은 막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입이 전혀 없었는데도 충동적으로 입양을 결정했다. 산도는 1년 정도 나와 함께 머물다가 다른 친구 집으로 입양됐다. 출장이 잦아서 산도를 홀로 둘 수 없었다. 지금은 그 친구와 연락이 끊어졌다. 산도의 안부를 핑계 삼아 연락해 볼 생각이다.
어정쩡한 반려견 입양 중개인 비슷한 입장이 되어 버렸다. 4, 5년간 2마리를 입양 보냈으니 성적이 좋은 편은 아니다. 돈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래도 두 생명을 지켜냈다는 자부심을 느낀다.
얼마 전 한 시민단체가 대형 마트의 애견센터가 동물보호법 위반을 하고 있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이는 대형 마트만의 문제가 아니다. 길거리 애견센터를 보자. 반려인구 1000만 명 시대에 대량 생산 되고, 또 소비되는 생명으로 가득 차 있다. 해마다 2만 마리가량의 유기동물이 안락사당한다고 한다. 이보다 더 많은 동물이 종량제 봉투 속에서 차갑게 식어갈 것이다. 그야말로 반려동물 대학살의 시대 아닌가.
단돈 1만 원. 똘구가 생명으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행복을 누리는 데 들어간 비용이다. 만약 똘구가 팔리지 않은 채 시장 상자에 남아 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여름철 복날마다 벌벌 떨고 있지 않았을까. 산도도 마찬가지다. 작은 생명이 부질없이 꺼져버리지 않았을까. 누군가는 인상을 쓰며 이렇게 묻는다. “뭐하러 돈을 쓰면서 그런 짓을 하느냐”고. 뭐 어떤가. 적은 비용에 이루 말할 수 없는 뿌듯함을 느낀다. 그리고 똘구와 산도는 살아 남았다. 세상을 빛내는 생명으로. 그야말로 ‘만 원의 행복’이다.
손민식 독립영화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