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군·일본군에 열세임에도 진격
- 최대·최후 격전지 가치 인정 받아
- 국가문화재 사적 제387호로 지정
- 위령탑 등 세우고 농민군 넋 기려
- 단출하지만 역사적 의미 서린 곳
‘우금티(우금치의 공주지역 표기)를 바로 앞에 두고 일본군과 관군 수십 명에게 밀려 승주골 골짜기에서 수많은 농민군이 죽고 도망간 것이 아쉬워서, 무릎팍으로 내밀어도 나갈 수 있었는데, 주먹만 내질러도 나갈 수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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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외세 반봉건’을 내걸고 보국안민 제폭구민을 외친 동학농민혁명의 최대 격전지이자 전쟁의 운명을 바꾼 충남 공주 우금치전적지. 사적 387호인 이곳에 ‘동학혁명위령탑’이 설치돼 있다. 이선정 기자 sjlee@kookje.co.kr |
‘백 보, 열 보…’를 외친 드라마 ‘고려거란전쟁’ 속 양규 장군의 최후 장면이 연상되는 이 말은 동학농민전쟁 최격전지인 충남 공주 우금치고개 바로 아래 봉정동 마을에 내려오는 구전이다. ‘이 고개만 넘었어도’라는 회한이 당시 백성의 아쉬움과 원통함을 그대로 보여준다. 동학농민혁명 130주년을 맞아 이 전쟁에서 가장 치열했던, 동학농민군(이하 농민군) 궤멸로 사실상 혁명의 운명을 가른 우금치전적지를 지난 17일 찾았다.
■끝내 넘지 못한 우금치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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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금치터널 상단부에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된 우금치고개. |
지금으로부터 130년 전인 1894년 11월(음력 기준). ‘보국안민(輔國安民·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함) 제폭구민(除暴救民·포악한 것을 물리치고 백성을 구함)’을 내건 ‘반봉건 반외세 운동의 선봉장’ 농민군 2만여 명이 저 고개를 넘어 충청감영(현 공주사대부고 자리)을 장악하고 한양(서울)으로 진격하고자 충청 전라 경상 등 전국 각지에서 이곳으로 총집결했다. 동학농민전쟁 역사상 가장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던 우금치고개. 남쪽에서 충청감영이 있는 공주로 들어오는 주요한 길목이어서 농민군과 관군 연합군에겐 둘 다 뚫거나 사수해야 하는 요지였다.
농민군은 신식 무기로 무장한 관군·일본군 연합군(일본군이 사실상 지휘)을 물리치기에 역부족임을 직감했음에도 진격을 택했다. 이 전투를 이끈 ‘녹두장군’ 전봉준은 붙잡혀 사형을 선고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농민군의 전투는 이듬해 3월까지 충청 전라 황해도 등 전국 곳곳에서 산발적으로 이어졌으나 우금치전투 패배를 기점으로 급격히 쇠퇴해 ‘아래로부터의 혁명’은 끝내 미완성으로 남게 됐다.
우금치터널 인근에 조성된 우금치전적지는 동학농민전쟁 최대·사실상의 최후 격전지라는 가치를 인정받아 1994년 3월 국가지정 문화재인 사적 제387호로 지정됐다. 역사적 의미가 깊은 사적 치고는 다소 단출했다.
너른 야외공원 상단에 설치된 ‘동학혁명위령탑’이 주 시설물이다. 농민군의 넋을 달래고자 1978년 11월 천도교 동학혁명위령탑건립위원회가 세웠다. 탑 양 옆으로 자그마한 돌탑이 있는데, 짚신을 신고 돌과 죽창 등으로 관군·일본군 연합군에 맞섰던 농민군의 당시 상황을 보여주려는 의도로 보인다. 무기는 열악하지만 보국안민 제폭구민을 향한 농민군의 순수하고 강한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위령탑 아래에는 ‘다시 살아나는 우금티’ 시비가 있다. 전적지 정비사업을 하면서 전국 각지 동학단체와 공주시민 220명에게 한 글자씩을 받아 220자로 구성된 시를 새겼다. 그래서인지 ‘백성은 하늘이다. 동학년 횃불 맨몸으로 일어선 오늘도 백성은 하늘이다’로 시작하는 시의 글자체가 글자별로 각각 달라 눈길을 끈다.
탑 왼쪽으로 조성된 둘레길을 따라 낙엽을 밟으며 조금 올라가면 견준산 기슭 우금치고개가 나온다. 우금치터널 상단의 야트막한 고개. 농민군이 이곳만 넘었어도 우리 역사는 달리 쓰였을까.
■‘반봉건 반외세’ 혁명은 미완이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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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의 역사를 되짚어볼 수 있는 알림터. |
전적지 시작점에 있는 ‘우금티전적알림터’로 내려와 여러 영상과 전시물,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동학농민혁명사를 되짚어 본다. 전시 관람이 끝나면 기념 판화와 스탬프도 찍어갈 수 있어 아이들과 함께하는 역사기행으로 좋다.
조선 말기, 폭정으로 부정부패가 득세하고 백성의 삶은 피폐해졌다. 그런 가운데 ‘인내천(사람이 곧 하늘·人乃天)’을 내세운 동학은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혹세무민했다는 이유로 처형당한 동학 창시자 최제우 교조신원운동을 벌이면서 세를 확장한 동학교도가 ‘군’으로 바뀐 도화선은 고부봉기였다. 탐관오리의 대명사 고부군수 조병갑의 폭압에 견디다 못한 백성은 1894년 1월 남접(동학교의 남쪽 조직) 지도자인 전봉준의 지휘로 고부관아를 습격, 점령하는 민란을 일으켰다. 농민군은 부정부패 척결, 내정 개혁, 민씨 척족정권 축출, 반일본을 내세우고 3월 백산봉기를 거쳐 4월 황토현전투(정읍)와 황룡촌전투(장성)에서 연전연승하며 전주성을 장악했다.
다급해진 조선 조정은 청에 파병을 요청해 5월 청군이 들어왔고, 조선 진입 핑계를 찾던 일본도 톈진조약에 따라 자동으로 군대를 조선땅에 상륙시켰다. 자국민을 진압하려 외국군대를 끌어들인 고종과 민비의 이 같은 최악의 결정은 결국 망국, 강제병합이라는 파국으로 귀결된다.
농민군은 더는 외국군 주둔의 빌미가 돼서는 안 된다고 판단, 조선 조정과 ‘전주화약’(5월)을 맺고 물러난다. 일본과 내통 엄징, 토지 개혁, 집강소 설치에 따른 아래로부터의 개혁 가속화 등을 요구한 이 협약을 통해 농민군은 반봉건 반외세 입장을 명확히 한다. 농민군은 해산했지만, 일본군은 철병 대신 경복궁을 점령(6월)하며 조선 침략의 야욕을 드러낸다. 왕후를 시해하고 조선땅에서 청일전쟁을 일으키며 본색을 드러낸 것이다. 격분한 농민군은 9월 재봉기 한다. ‘경복궁을 탈환하고 내 나라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농민군은 논산에 집결, 북쪽으로 나아갔다. 공주에 있던 충청감영을 교두보로 삼아 한양으로 향하려던 농민군은 그러나 11월, 우금치라는 고비를 끝내 넘지 못했다. 미완이었으나 자주적 개혁을 외친 혁명정신은 항일독립운동과 민주화 역사로 유구히 이어진다.
공주 일대에서 벌어진 동학농민혁명의 전투 흔적을 좀 더 보고 싶으면 ▷농민군이 점령한 곳을 관군이 공격한 ‘이인’ ▷농민군이 관군 포위망을 뚫지 못하고 퇴각한 ‘효포’ ▷농민군이 몰살당한 장소 중 한 곳인 ‘송장배미’ 등지를 둘러봐도 좋다.
# 백제의 숨결 품은 공주…공산성·무령왕릉·국립박물관도 필수코스
■ 주변 볼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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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공주박물관에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이 전시돼 있다. 맨 앞 동물석상은 무령왕릉이 도굴되지 않게 지켜준 수호신으로 평가받는 ‘진묘수’. |
동학농민혁명 사적지 외에도 충남 공주에는 가볼 만한 여행지가 가득하다. 공주는 ‘웅진 도읍기(475~538년)’ 백제의 수도가 있었던 곳이어서 왕성 왕릉 등 유적지가 많다. 공주는 2015년 7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백제역사유적지구’의 주요 도시다.
고구려의 침략으로 수도였던 한성(서울)이 함락당하자 문주왕은 이곳 웅진(공주)으로 천도를 단행했다. 웅진은 사비(부여)로 수도를 옮기기 전까지 63년간 수도였으며 백제 중흥을 이끌었다. 공산성은 늘 관광객으로 북적인다. 웅진백제 시기를 대표하는 왕성으로 백제 때는 웅진성, 고려 때는 공주산성, 조선 인조 이후에는 쌍수산성으로 불렸다. 입구인 금서루를 지나 성곽길을 따라 걸으면서 천천히 성 구경에 나서 보자. 특히 성 옆으로 흐르는 금강의 풍광이 압도적이다. 다만 성곽길은 가파르고 난간이 없어 위험할 수 있으니 유의하자.
공산성 내 여러 건축물도 눈길을 끈다. 물 저장소 역할을 했던 연지 및 만하루는 인기 포토존이고, 성 가운데 왕궁터로 추정되는 너른 들판도 탁 트인 전망을 자랑한다. 쌍수정은 조선시대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해 이곳으로 파천했을 때 잠시 머물렀다고 한다. 공주 특산품인 밤을 이용한 디저트 가게가 공산성 주위에 즐비한데, 밤라테를 사들고 공산성에 오르니 쌀쌀한 날씨에 몸도 녹고 당충전도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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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특산품인 밤으로 만든 밤 라테. |
무령왕릉과 왕릉원도 공주에 가면 들러야 한다. 무령왕 등 백제왕과 왕족 무덤 7기가 복원돼 관람객에게 개방된다. 5, 6호분 배수로 작업 도중 우연히 발견된 무령왕과 왕비의 합장릉인 무령왕릉은 삼국시대 무덤 중 유일하게 무덤 주인을 알 수 있는 곳으로 금제관장식 등 유물이 5200여 점이나 출토됐다. 실제 무령왕릉은 들어갈 수 없고, 왕릉원 초입에 마련된 전시관에서 상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 전시관에서는 무령왕릉의 무덤방을 재현해 놓았는데, 연꽃무늬 벽돌로 쌓아 올린 무덤방은 번성한 백제문화를 가늠케 한다.
인근에 국보 12점 등 유물이 보관 중인 국립공주박물관이 있는데, 박물관 전시품 중 국보 162호 진묘수가 특히 눈길을 끈다. 왕릉원 중 유일하게 도굴되지 않은 무덤인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것으로, 후대는 상상의 동물 진묘수가 도굴로부터 왕과 왕비를 지킨 수호신 역할을 했다고 해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