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환 축구해설위원은 한 프로그램에서 “그 경기 이후 십 수년이 지났지만, 이탈리아에는 못 갔다”고 고백했다. 2002년 월드컵 당시 세리에A의 페루자FC 소속이었지만, 8강 전에서 ‘연장 골든볼’을 터뜨린 ‘죄 아닌 죄(?)’로 그는 이탈리아인들에게 ‘공공의 적’이 됐다. 페루자 구단주는 일방적으로 계약을 해지했고, 팬들은 현지 집과 차량을 부쉈다. 마피아는 ‘가만 두지 않겠다’는 협박까지 서슴지 않았다. 그런데 정작 가장 억울했을 안 위원이 말미에 던진 말이 걸작이다. “이탈리아에서 축구란 그런 거예요. 단순한 스포츠가 아니라, 그 사람들 삶의 거의 전부죠.”
월드컵 4회 우승의 강호지만, 이탈리아만큼 부침이 심하고 이야깃거리가 많은 팀도 드물다. 첫 전성기인 1930년대의 영광 이면엔 대표팀을 향한 죽음의 총구가 겨눠지고 있었다. 자국에서 열린 1934년 제2회 월드컵과 1938년 프랑스월드컵 연속 우승, 1936년 베를린올림픽 금메달은 모두 죽음의 공포와 싸워 거머쥔 생명줄이었다. 파시스트 무솔리니 일당은 축구를 통해 정권의 정당성을 입증하려 했다. 그들은 1934년 대회 직전 선수들에게 “승리하라. 아니면 죽음뿐!”이라는 전보까지 친다. 이탈리아 축구의 상징인 ‘빗장수비’, 즉 ‘카테나치오’ 전술의 뿌리도 “지면 죽는다”는 절박함에서 비롯됐다는 설도 있다. 결승전에서 패한 체코의 선수는 “우리는 11명의 목숨을 살렸다”고 말했다.
대표적인 축구의 정치화 사례인 이런 과정을 겪은 이탈리아는 1982년에 와서야 월드컵 3회 우승을 이룬다. 2002년 한국에 일격을 당했지만, 2006년 월드컵에서는 보란듯이 4번째 우승을 하더니, 2018년 월드컵에선 유럽지역예선에서 탈락한다. 60년만의 본선 진출 실패.
그런 이탈리아가 어제 ‘유로 2020’ 결승전에서 ‘종가’ 잉글랜드를 꺾었다. 1968년 이후 53년만의 우승이다. 그런데 더 관심이 가는 것은 불과 3년 전 월드컵 본선 실패라는 대참사를 겪은 팀이 어떻게 34경기 무패(28승 6무) 행진의 ‘무적 아주리 군단’으로 부활했는가 이다. 여러 분석이 있지만, 이날 1-1 동점골의 주인공인 ‘노장’ 레오나르도 보누치(34)의 말에 가장 공감이 간다. “바닥까지 추락해보니 다시 힘을 내게 되더라.”
누구나 바닥은 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절망하지 않는 것이다. 이번 우승이 코로나19로 12만7000명이나 숨진 OECD 치사율 1위 국 이탈리아 국민에게도 ‘희망의 씨앗’이 되길 바란다. 보누치의 저 명언처럼 말이다.
이승렬 논설위원 bungse@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