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12·3 비상계엄은 야당을 향한 경고용이다”고 발표했을 때 든 생각은 ‘대통령이라는 저 자는 참 비겁하구나’였다.

12·3 비상계엄 사태에 관한 다양한 보도와 증언을 통해 많은 사실이 드러났다. 계엄군 국회 진입이 조금만 더 빨라서 정시에 이뤄졌다면, 국회의사당 안에 있던 국회의원을 ‘정족수가 차지 않은 상황’에서 끌어냈다면, 주요 정치인을 체포하고 구금하라는 지시 등등이 성사됐다면 …. 대통령 자신이 획책한 많은 시도가 ‘성공하겠다는 의지로 실행 플랜을 준비한 비상계엄’이었다는 사실과 그 일련의 행위가 헌법을 어긴 상황이 속속 드러났다. 그런데 실패하자 ‘아냐, 그냥 경고용이었어’라고 무마하려 했다.

센 척 강한 척 남성스러운 척을 그렇게 하더니 저런 식으로 얼버무리는 장면에서 비겁을 느끼지 않을 도리는 없었다.

정치란 협상하고 타협하고 주고받으면서 공공복리라는 목적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일이 본질이다. 상대가 저렇게 나왔다면, 이쪽에서도 일이 그렇게 흘러가도록 원인을 제공했을 수 있다. 그러니 돌아볼 건 돌아보고 줄 건 주고 받을 건 받는 ‘과정’은 정치의 근간이다. 그게 안 풀린다고 ‘일거에 척결’을 진짜로 시도한 모습은 공동체가 운영되는 원리의 근본을 파괴하는 짓이다.

한국 사회라는 공동체가 운영되는 원리의 근본을 구체화한 것이 헌법이다. 다른 존재를 인정하지 못하는 안하무인, 유아의 고집 같은 모습이 12·3 비상계엄 시도에서 역력하게 나타났다.

박찬대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지난 14일 저녁 국회에서 발표한 대통령 탄핵소추안 제안 설명에는 1980년 5월 17일 계엄사령부 포고령 10호의 7가지 세부 조치가 포함됐다. 이걸 지난 3일 발표된 계엄사령부 포고령 1호와 비교해 읽어보았다. 세부 표현과 수식어 등을 찬찬히 살피면 1980년의 5·17 계엄사령부 포고령이 지난 3일 계엄사령부 포고령 1호보다 미세하게나마 더 ‘인간적인’ 데가 있는 게 아닌지 하는 느낌까지 들었다.

예컨대 1980년 포고령 10호는 정치 활동을 ‘중지’하며 집회·시위를 금한다면서 몇 가지 예외 조항은 둔 반면 12·3 비상계엄 포고령은 (계엄령으로 제한할 수 없는) 국회 등의 정치 활동 일체와 결사·집회·시위를 금한다고 돼 있다. 일절 다른 설명은 없다. 80년의 포고령은 직장이탈·태업·파업을 금한다면서 ‘정당한 이유 없는’이라는 단서라도 붙였지, 12·3 포고령은 그런 건 없다. 언론 통제 관련 표현이나 ‘의료인 처단’ 문구까지 읽으면, 5·17보다 12·3 포고령이 더 무섭게 다가오기도 한다. 44년 전으로 퇴행한 게 아니라 더 간 느낌이다.

국제신문 유튜브 채널에 윤석열 대통령 탄핵 촉구 집회에 참가한 부산 젊은이의 발언을 담은 짧은 영상이 여러 건 있다. 그 영상을 보고 공통의 염원 몇 가지를 추릴 수 있었다. “원래 저는 정치에 관심이 높은 편은 아니었다.” “그런데 민주주의가 무너지는 것을 보고 열 받아서 계속 나온다.” “한 손이라도 보태고 싶었다.” “저라도 힘을 보태고 싶었다.” “협치하는 정치를 원한다.” “사랑이 가득한 나라가 됐으면 좋겠다.”

이런 염원은 좌·우, 진보·보수 차원 목소리가 아니다. 이쪽이든 저쪽이든 상식·원칙·공정의 판을 깨지 말고 경쟁하면서 그런 바탕 위에서 더 괜찮은 나라, 더 좋은 미래를 건설하는 국가로 가꿔달라는 ‘평범한’ 당부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14일 국회에 의해 탄핵됐다. 이즈음에 역사를 떠올린다. 역사학자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이 유튜브 채널 ‘이덕일의 역사tv’에 얼마 전 강연 영상을 올려 조선을 긴 세월 지배한 노론 세력을 비판했다. 이덕일 박사는 이 영상에서 자신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는 진영론에 가담하지 않는다고 밝힌다. 특정한 정치 세력과 연관돼 있지도 않음을 전제한다. 그러면서 조선의 특정한 정치 세력이 나라의 이익보다 자기 집단의 이익을 앞세우며 끈질기게 권력을 부여잡고 나라를 망국으로 이끈 역사를 들려준다.

이런 식으로 누적된 위기가 현실로 들이닥치면 국가는 위기에 빠질 수밖에 없는데, 잘 살피면 그때마다 등장해 위기 극복의 길에 앞장서는 존재가 있다. 바로 국민이고 백성이다. 그런 점에서 석학 조동일 박사가 주창하는 ‘대등론’ 또한 이 시점에 주목할 만하다. 지배층이 끊임없이 차등의 질서와 세계관을 주입하면서 자신들이 이익을 챙기는 사회를 만들려 하지만, ‘너와 나의 차이는 인정하지만 우리는 서로 대등하다’는 대등론으로 맞선 국민이 나라를 더 나은 길로 이끌었음을 예술·문화를 중심으로 보여주는 학설이라서 그렇다.

대통령 탄핵에 관한 결정은 이제 헌법재판소로 넘어갔다. 깊은 논의가 이뤄지기 바란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조봉권 문화라이프부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