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가들 중에는 그림에 재능을 보인 이가 많다. 문학과 미술의 예술적 유전자가 비슷한 면이 많아서일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문인화’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빼어난 문인이자 화가인 이가 많았고, 이들의 작품은 전문화가 못지않은 높은 수준을 보였다. 강세황 신위 김정희 등 문인들의 그림 수준이 뛰어났고, 이인상 김홍도 조희룡 등 화가이면서 글 솜씨도 좋은 이들도 많았다. ‘서화동원(書畵同源)’이나 ‘문자향서권기(文字香 書卷氣)’ 등의 말은 모두 문학과 미술과의 친근 관계를 보여주는 말이다. 그러나 근대기에는 화가의 전문성이 높아져 조선시대만큼 글 잘하는 이들이 그림을 잘 그리는 경우가 흔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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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구현의 ‘금강산 풍경’. |
근대기 문인으로서 그림을 잘 그린 이로는 시인으로 유명했던 ‘천마산인(天摩山人) 권구현(權九玄, 1902-1938)’이 단연 돋보인다. 권구현은 시인이자 화가이며 미술평론가로 활동한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다. 충북 영동 출신으로 ‘구현(九玄)’은 필명이며, 본명은 권구현(權龜鉉)이다. 문학인으로 활동할 때에는 ‘흑성(黑星)’이라는 호를 주로 썼으며, 화가나 미술평론가로서 활동할 때는 ‘천마산인’을 사용했다. 음악에도 재능을 보여 젊은 시절에는 유랑극단 단원으로 전국을 돌아다니며 판소리 단가를 불렀다. 당대의 명창 이동백과 견주어도 무색하지 않을 만큼 실력이 뛰어났다고 한다.
권구현은 미술에 대한 열정을 이기지 못해 1923년 극단 생활을 그만두고 일본으로 건너가 미술공부를 하고 돌아와 전시회를 열고,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해 세 차례나 입선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예술적 재능은 미술보다는 문학에서 더 빛을 발했다. 1927년 카프(KAPF)에 가담했다가 곧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의 편에 서서 적극적인 문학 활동을 했다. 그의 작품은 시조류가 주류를 이루었는데, 1927년에 간행된 ‘흑방(黑房)의 선물’이 대표 작품집이다.
그동안 ‘시인 권구현’에 대해서는 여러 연구가 있었지만 화가로서는 많은 관심을 받지 못했다. 도쿄에서 공부한 행적도 명확치 않고, 작품도 거의 남아 있지 않아 화가로서의 전모를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겨우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된 세 점의 도판만으로 그의 작품세계를 추정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의외로 항간에 떠도는 권구현의 작품은 적지 않다. 주로 산수화가 많으며, 인물화나 사군자도 간혹 보인다. 산수화는 남종화의 담백한 필치를 보이나 세련된 맛이 적고, 안정된 구도의 포치에 약간의 담채를 더해 장식적인 면을 강조했다.
현전하는 그림 중에는 금강산 ‘삼선암’과 ‘명경대’를 그린 것이 좋다. 일제강점기에 경원선 철도가 생기면서 일본인들을 중심으로 금강산 유람을 하며 금강산 그림이 크게 유행했다. 조선시대 필법보다는 세필로 섬세하게 그리는 일본의 신남화 기법에 바탕을 두어 맑은 화면을 보여준다. 또한 사진을 보고 그리는 기법이 보이기도 하는데, 원근법을 잘 표현하고 세밀한 부분까지 빠뜨리지 않고 묘사해내는 장점이 있다. 그동안 권구현은 미술인으로 큰 대접을 받지 못했는데, 근래에 여러 작품이 발견되며 화가로서 연구할 만한 상황이 되었다. 모든 예술 분야에 능통한 천재 예술인으로서의 권구현에 대한 연구가 새로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