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통화로 안부를 묻는 지인들에게 “뭐, 저야 다람쥐 쳇바퀴 인생이지요”라며, 별 탈 없이 지내고 있다는 것과 반복되는 일상을 살고 있다는 것을 한꺼번에 에둘러 말하곤 한다. 처음에는 새로운 것 없이 나날을 보내고 있다는 자조 섞인 푸념이 담겨 있었지만, 삶에 있어 반복이 만들어가는 의미를 깨닫게 된 이후로는 ‘그렇게 사는 게 나예요’라는 뜻이 덧대어졌다. 생명 유지를 위한 원초적 활동 외에 일상에서 반복되는 노동과 놀이는 내가 어떤 일을 하고 무엇을 좋아하는 사람인가를 드러낼 테니, 결국 반복은 ‘나’라는 개체의 정체성을 이루는 과정이며, 그것을 이어가고 또 그 과정에서 새로운 것들을 수용해 고유한 나만의 인생을 만든다는 것을 일상의 반복으로부터 느낀 것이다.

지구의 자전과 공전이 만든 날과 해의 반복주기 속에서 생성된 생명체이기에 이러한 대자연의 순환을 섭리로 삼고 그에 적합한 에너지 효율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반복이라는 메커니즘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몸으로부터 느껴지는 맥박과 호흡은 대자연과 나, 그리고 우리를 연결하는 순환의 고리에서 가장 작은 단위의 프로토콜로 작용하며, 일정한 간격으로 반복되는 심장 박동, 들숨 날숨으로 느껴지는 폐부의 확장과 수축은 무한의 시공을 우리가 느끼고 가늠할 수 있는 덩어리로 만든다. 이러한 까닭에 우리는 예술작품에서 일정한 반복을 통해 감정의 고조 혹은 균형미를 느끼며 시의 운율, 그리고 음악 무용 미술에 있어 리듬을 예술의 본질적 요소로 여기거나 이해한다.

중학교 음악 시간에 필기시험을 위해 무턱대고 외웠던 제시부 발전부 재현부로 구성된 소나타 형식과 주제와 주제의 반복 등에 관한 내용은 몇 년이 지나서야 작곡법을 배우며 이해할 수 있었다. 이해라고 해 봐야 주제 선율을 확장하기 위한 기법을 익히는 수준이었지만, 반드시 주제(A)는 반복하거나 변화된 주제(A｀ )로 다시 나타내야 한다는 첫 배움의 기억은 아직도 뚜렷하다. 배울 당시나 또 익혀서 직접 선율을 만들 때도 주제 A를 반복하거나 변화된 주제 A｀ 를 나타내는 방법은 수학 공식을 적용하듯 기계적이었다. 그리고 아주 긴 시간이 흐른 뒤에야 ‘A-B-A’, ‘A｀ ’ 등에 담긴 반복과 변화의 의미를 세월 속에서 깨닫게 되었다. 고유한 성질, 즉 정체성은 본질이 되는 어떤 것이 반복적으로 작용해 양식을 이루며 그 과정에서 새로운 요소를 만나 변화하고 확장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A｀ 는 고유한 성질을 유지한 채 새로운 무언가를 수용해 더욱더 고유성이 확장된 의미를 담은 기호로 느껴진다.

당연하겠지만 한반도 또한 오랜 시간 주변국과 다양한 문화 교류를 통해 영향을 주고받으며 지금에 이르렀고 가장 빈번한 교류 대상은 중국이었다. 우리나라에 유입된 중국의 음악을 ‘당악’으로, 토착 음악을 ‘향악’으로 구분했는데, 이 둘이 함께한 형태가 조선 시대 향당교주(鄕唐交奏)다. 향악과 당악은 서로 다른 체계와 속성을 지녀 두 나라의 악기를 같이 연주하며 조화를 이루기 쉽지 않았으므로 처음에는 각기 또는 번갈아 연주하는 방식으로 향유되다가, 점차 향악기와 당악기를 함께 편성해 연주하며 지금의 형태로 정착됐다. 당시 궁중무용은 향악에 맞춰 추던 춤(향악정재)과 당악에 맞춰 추던 춤(당악정재)으로 구분했다. 이후 향당교주의 연주 방식이 궁중무용의 반주 음악으로 빈번하게 사용되며 궁중무용의 반주 음악으로 불릴 정도로 당악의 향악화가 점진적으로 나타난다. 조선 중·후기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현상이 뚜렷해져서 음악 내용의 변화는 물론 악기 연주에 있어서도 향악기와 당악기 편성 구분이 모호해졌는데 이는 과거 문화접변 과정에서 타문화 수용을 통해 정체성을 확장한 A｀ 의 일례인 것이다.

우리나라는 일제 강점기와 급격한 서구화로 인해 민족문화와 정체성 계승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러한 연유로 국악진흥법 제정과 함께 6월 5일이 ‘국악의 날’로 지정돼 올해 처음으로 시행된다. 우리의 정체성을 잇고 확장하는 차원에서 ‘국악의 날’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겨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