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한아의 장편소설 ‘3월의 마치’는 노년기에 접어든 여배우 이마치가 알츠하이머병을 치료하기 위해 과거를 복원하는 이야기다. 이마치는 생애의 기억이 연도별로 저장된 가상의 건물로 들어가서 과거의 자신을 만난다. 건물의 층수는 그녀의 나이다. 43층으로 가면 43살의 자신을 15층으로 가면 15살의 자신을 만날 수 있다. 무작위로 차오르는 기억을 막을 방법은 없으며, 사라졌던 기억들은 매번 새롭게 달려든다.

지금은 고층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미아동 언덕에 외할머니가 살았다. 재개발이 되기 전에는 허름한 주택촌이었다. 엄마는 일 년에 두 번 어린 나를 데리고 외할머니 집으로 갔다. KTX가 없던 그 시절에는 부산에서 서울까지 5시간이 걸렸다. 그 시간이 지겨웠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바나나우유와 삶은 달걀, 귤을 먹다가 잠시 졸고 나면 서울역이었다. 기차에서 내리면 최루탄 가스 때문에 눈을 뜨기 힘들 때도 있었는데 그런 날은 치약을 짜서 코 밑에 발랐다. 줄이 긴 택시 승차장으로 가서 담배 냄새가 찌든 택시를 타면 그제야 서울에 도착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언덕 아래 큰길에서 내렸다. 무거운 짐을 들고 차가 다닐 수 없는 좁은 골목을 올라야 외할머니 집이 나왔다. 외할머니 집에는 초인종이 없어서 대문을 두드려야 했는데 나는 그러지 않고 큰소리로 외할머니를 불렀다. “할머니! 저 왔어요!” 외할머니는 유독 무뚝뚝해서 오랜만에 만나더라도 안아주거나 쓰다듬어 주지 않았다. 문을 열자마자 먼저 등을 보이는 외할머니를 따라 집으로 들어가면 외할아버지의 사진이 나를 반겨주었다. 어느 날 외할머니는 그 사진을 가리키더니 이렇게 말했다.

“살아계셨다면 널 정말 사랑했을 거다, 목말을 태우고 다녔겠지.”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외할아버지와 단숨에 사랑에 빠졌다. 아마도 6살쯤이었을 것이다. 만약에 외할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엄마가 사주지 않는 불량식품을 사주었을 테고, 동생이 아닌 내 편을 들어주었을 테고, 바쁜 부모님 대신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을 텐데. 반겨주지도 않고 야단만 치는 외할머니를 혼내주었을 텐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 외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사실이 억울하기까지 했다. 밤이 되면 외할머니가 깔아준 폭신한 이부자리에 누워 외할아버지를 만나는 상상을 했다. 아침이 되면 타임머신을 타고 온 외할아버지가 나를 깨워주길 기도하면서. 부산에 돌아와서도 속상한 일이 생기거나 외로울 때면 외할아버지를 떠올렸다. 외할아버지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따뜻한 위로가 됐다.

대학교에 다닐 때 외할머니 집에서 한 계절을 지낸 적이 있었다. 놀러 온 친구가 외할아버지의 사진을 보며 누구냐고 물었다. 사진은 노랗게 바래있었다. 외할아버지라고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너는 외할아버지를 닮았구나, 표정이 똑같다. 사진을 들여다보던 친구가 말했다. 외할아버지는 여전히 다정한 눈빛을 하고 있었지만 어느새 사랑은 추억이 됐다.

외할머니는 93살에 살던 집을 정리하고 부산으로 내려와 엄마와 일 년을 지낸 뒤 돌아가셨다. 갑자기 심근경색이 왔고, 하룻밤을 넘기지 못했다. 엄마는 장례식 내내 통곡했다. 화장하지 않고는 슈퍼에도 가지 않던 엄마가 세수도 하지 않고 울기만 했다. 나는 울지 않았다.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외할머니와의 추억이 많지 않았고 사랑을 받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바나나우유와 삶은 달걀, 개똥이 굴러다니던 미아동 골목길, 초인종 없던 녹색 대문, 외할머니 방에서 나던 쿰쿰한 냄새 같은 것들만 잠시 떠올랐다가 사라졌을 뿐이다.

여러 해가 지난 뒤에야 생각났다. 초록이 무성한 여름이었다. 건널목 건너편, 목말을 탄 아이를 보자 불현듯 외할머니의 말이 떠올랐다. 살아계셨다면 널 정말 사랑했을 거다, 목말을 태우고 다녔겠지. 유년 시절 내 마음을 가득 채웠던 사랑이 거짓말처럼 다시 피어올랐다. 차오르는 기억을 막을 방법이 없어서 그 자리에 서서 울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