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들어 글로벌 경제질서의 불확실성과 불안정성이 증폭되고 있다. 기후위기, 코로나 팬데믹, 기술패권 경쟁과 우크라이나 전쟁에 이르기까지 세계는 더 이상 1990년대 자유무역 낙관주의에 기대어 움직이지 않는다. 또하나 트럼프 대통령이 재집권하면서 미국의 하드파워를 지렛대로, 관세를 무기 삼아 굴욕적 양보를 이끌어내는 방식의 ‘미국우선주의’를 정당화하고 있다. 주요 동맹국인 유럽연합(EU), 일본과 한국을 포함한 14개국에 25%의 관세를 통보하고 지난달 31일을 데드라인으로 밀어붙여 15% 관세, 제조업 분야에 일정 규모의 대미 투자와 농산품과 천연가스 등의 구매 약속을 이끌어냈다. 이러한 미국의 일방적 관세협상은 자국 이익을 위해 동맹관계마저 경제적 압박 수단으로 전락시키고, 기존 FTA 체계와 WTO 체제를 무력화하면서 자유무역 기반 자체를 흔들고 있다. 지난 4월 IMF ‘세계경제 전망’ 보고서는 미국의 일방적 관세 부과로 올해 세계 경제성장률을 0.5% 낮아진 2.8%로 전망할 정도로 세계경제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보여주고 있다.
트럼프 정부가 세계 2차대전 이후 미국이 주도해온 자유무역질서를 흔들면서 일방적인 관세정책을 강요하는 이면에는 “불공정 자유무역은 미국의 희생을 전제로 한다”는 사고방식이 있다. 즉 한국 EU 일본 중국 등과 대규모 무역적자, 미국 제조업 쇠퇴와 중산층의 실업 증가, 중국의 G2 부상 등이 증거라는 것이다. 따라서 미국에 불리한 기존 협상들을 재협상하거나 철회하는 것은 ‘공정무역’과 ‘국가안보’를 위해 정당하다는 논리이다. 특히 중국 견제를 명분으로 반도체, 전기차 및 배터리, 철강과 조선산업 등에서 보듯이 동맹국들까지 ‘선택적 특혜’를 무기로 삼아 희생을 강요하는 새로운 형태의 경제적 압박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런 전략은 전형적인 제로섬 사고방식에 기반하고 있다. ‘타인의 이익이 곧 나의 손해라는 인식’. 다시 말해 누군가의 성장은 곧 자국 산업의 위협으로 간주되므로, 사전에 차단하거나 최소화해야 한다. 미국은 더 이상 세계 경제질서의 ‘룰 메이커’를 자처하지 않는다. 오직 ‘내가 이기려면 누군가는 반드시 져야한다’는 방식으로 새로운 질서를 재편하고 있다. 현실적으로 자국내 산업 보호, 중산층 일자리 회복이라는 국내 정치적 필요를 앞세워, 동맹국들마저 경제적 도구로 활용하고 있다.
예컨대 한국의 전기차, 배터리나 철강 제품에 부과되는 관세 조정은, 무역 원칙보다 전략적 우선순위에 따른 ‘선택적 배제’에 가깝다. 또한 미국은 중국의 기술 굴기를 위협으로 간주하며 반도체와 인공지능 분야에서 고강도 수출 통제정책을 시행한다. 공급망 동맹, 이른바 ‘프렌드쇼어링’ 전략 또한 비슷한 논리에서 나온다. 중국 역시 자국산업 보호에 더욱 힘을 실으며, 희토류 광물 수출과 글로벌 투자 규제를 강화하고 있다. 이런 흐름은 상대국의 보복조치를 유발해 보호장벽이 강화되고 세계무역의 실질적인 감소로 나타나고 있다. 문제는 이런 제로섬 전략이 국가 간 힘에 의한 대립과 갈등을 확대하고 신뢰와 협력관계를 축소함으로써 글로벌 질서체계를 허물고 있다는 것이다. 경제는 기본적으로 상호의존적이다. 한 나라의 기술이나 자원이 완결된 시스템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국가와 기업의 연결 속에서 작동해 경제성장을 이끈다.
그런데 지금처럼 신뢰없는 경쟁, 연대보다는 봉쇄가 앞서는 질서 속에서 이런 연결망이 해체되면, 세계는 ‘비용이 더 들고, 리스크가 더 큰’ 방향으로 움직이며 좀 더 궁핍해질 수밖에 없다. 이런 구조에서 한국처럼 수출 의존도가 높은 국가일수록 협상력이 약화되고, 장기적으로 ‘강대국 간 틈새에서 생존’을 고민해야 한다. 더 우려스러운 점은 제로섬 사고방식이 미국과 서유럽 등 개별국가의 국민정서 속으로 파고들고 있다는 것이다. 국내 일자리 감소, 물가 상승, 양극화 등 사회의 모든 문제를 외부 탓으로 돌리고 보호주의와 자국우선주의를 정당화하며, 다른 나라의 경제성장이 ‘우리의 몫을 뺏어간 결과’라고 왜곡하는 정치적 포퓰리즘의 부상으로 국내외 정치적 분쟁이 확산되고 있다.
지금 세계는 ‘대립과 갈등에 의한 궁핍한 미래’와 ‘신뢰와 협력에 의한 좀더 나은 미래’라는 혼돈의 경계선에 서 있다. 모든 국가가 국익을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것이 당연한 명제라면 제로섬 사고방식이 아닌 상호이익 관점에서 국제협정이 체결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한미와 한일 정상회담을 앞둔 현 시점에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세계관은 다자적 틀 안에서 신뢰를 쌓아 협력을 모색하고 새로운 기회를 창출해 상호이익을 확대하는 ‘공존 속의 성장’이 되어야 할 것이다. 위협과 폭력이 상존하는 국제사회에서 새로운 상상력을 바탕으로 다자협력과 자율적 전략의 실행역량을 갖춘, K-문화처럼 세계를 보듬는 우리의 모습을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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