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울 허(虍-6)없을 무(火-8) 따를 인(口-3)좇을 순(彳-9)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나 因循守舊(인순수구)의 무리가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그런 무리가 정권을 쥐고 역사를 주도해 나간 시기가 더 길다. 그러니 전 세계인이 경이롭게 여기는 촛불혁명을 이룬 한국 사회엔들 그런 무리가 없을까. 아니, 적폐 청산의 목소리가 드높은 가운데서도 그들은 여전히 건재하다. 그들이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며 국가와 시민의 안위를 안중에 두지 않았기 때문에 촛불혁명이 일어났던 것인데, 당연하게도 한 번의 혁명으로 그런 무리가 사라지는 일은 없다. 오히려 더욱 은밀하게 또 끈질기게 혁명의 발목을 붙잡고 퇴행의 기회를 엿보고 있을 것이다.
촛불혁명은 시민이 스스로 나서서 이룬 것임에도 틈만 나면 종북·좌파 세력이 일으킨 것이라며 부정하고 모독하거나, 끊임없이 가짜 뉴스를 생산하고 사실을 왜곡하여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정부를 궁지로 몰아넣는 것도 그들, 인순수구의 무리다. 최근 일본 정부가 한국을 향해 수출을 규제한다고 하자 도리어 한국 정부를 비난하는 자들, 일본 정부를 두둔하는 언론들도 전형적인 인순수구의 무리다.
낡은 인습을 버리지 않고 그대로 따른다는 뜻으로 쓰이는 因循(인순)이란 말은 본래 도가에서는 다른 뜻으로 쓰였다. ‘문자’를 보면, ‘道原(도원)’에서는 “因循而應變”(인순이응변) 곧 “상황을 따르고 변화에 응한다”고 했고, ‘上德(상덕)’에서는 “聖人虛無因循”(성인허무인순) 곧 “성인은 마음을 텅 비우고 상황을 따른다”고 했다. 요컨대, 어떠한 상황에서도 마음을 텅 비우고 사태를 파악하면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다는 뜻이다.
지고한 목표를 세웠더라도, 순수한 동기로 나서더라도 그런 목표와 동기가 마음에 꽉 들어차 있으면 상황 변화에 따른 적절한 대응은커녕 사태를 파악하는 일조차 그르치기 십상이다. 하물며 마음속에 사사로움이, 머릿속에 그릇된 관념과 편견, 선입견이 똬리를 틀고 있다면, 시세 변화를 거스르면서 퇴행적인 짓을 하지 않겠는가? 작금에 한국 사회는 이 이중적인 因循(인순)이 뒤엉킨 때, 易(역)의 순간에 직면해 있다. 危機(위기)이자 機會(기회)인.
고전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