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살생(生-0) 있을 재(土-3) 잡도리할 경(夂-9) 삼갈 계(戈-3)
‘춘추좌전’ ‘魯襄公(노양공) 23년(기원전 550년)조’ 말미에 仲尼(중니) 곧 공자의 논평이 실려 있다. 이 논평은 노나라의 臧武仲(장무중)에 대한 것이지만, 때마침 그해에 난영이 죽고 그 일족이 도륙되었으므로 저절로 난영을 떠올리게 한다. “知之難也. 有臧武仲之知, 而不容於魯國, 抑有由也. 作不順而施不恕也.”(지지난야. 유장무중지지, 이불용어노국, 억유유야. 작불순이시불서야) “지혜가 있어도 처신하기란 어렵다. 장무중이 지혜로웠음에도 노나라에서 용납되지 못한 데에는 그럴 만한 까닭이 있다. 그 행위가 사리에 맞지 않고 은혜를 베풀면서 관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혜롭고 덕이 있어 성인으로까지 불렸던 장무중도 노나라 내부의 후계자 분쟁에 개입했다가 제나라로 망명해야 했다. 제나라에서는 또 자신에게 땅을 주려 했던 齊莊公(제장공)에게 쥐를 닮았다고 말해서 화나게 만들었다. 난세에는 지혜로워도 처신하기 어려운데, 교만하게 굴어서야 온전할 수 있겠는가? 난영이 진나라에서 쫓겨났을 그즈음에 鄭(정)나라의 대신 公孫黑肱(공손흑굉)은 병이 들었다. 그는 곧 자신이 食邑(식읍)으로 받은 땅을 군주에게 돌려주고 가신들과 집안사람들을 소집해서는 아들 段(단)을 후계자로 세웠다. 이때 그는 가신들을 줄이고 제사도 간소하게 지내라고 했다. 또 보통 제사에는 양 한 마리만 제물로 쓰고 성대한 제사일지라도 양과 돼지만 쓰도록 했다. 이어 제사 지내기에 충분한 재산만 남기고 나머지 땅은 모두 나라에 반환했다. 그러고는 자식을 불러놓고 당부했다. “吾聞之, 生於亂世, 貴而能貧, 民無求焉, 可以後亡. 敬共事君與二三子. 生在敬戒, 不在富也.”(오문지, 생어난세, 귀이능빈, 민무구언, 가이후망. 경공사군여이삼자. 생재경계, 불재부야) “내가 듣건대, 난세에 태어나 고귀한 지위에 있으면서 청빈하게 살면 백성에게서 빼앗는 것이 없으므로 남들보다 늦게 망한다고 했다. 너는 군주와 대부들을 공경스런 자세로 섬기도록 하라. 난세의 삶은 잡도리하여 삼가는 데에 있지 부에 있는 것이 아니다.”
고전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