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최(山-8) 북저(木-4) 죽일 시(弋-8) 그기(八-6) 임금 군(口-4)
영국의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 1729∼1797)가 귀족, 성직자, 시민 세 신분에 이어 네 번째 사회적 세력으로 성장해가던 신문을 두고 ‘제4계급’이라 한 데서 ‘제4의 권력’이라는 말이 나왔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서구에서는 기자가 매우 근대적인 존재라 할 수 있겠으나, 동아시아로 오면 꼭 그렇지 않다.
널리 알려진 역사가 司馬遷(사마천)을 비롯해 그를 잇는 수많은 역사가도 기자나 다름이 없었고, 특히 우리 역사에서 고려와 조선 시대에 史草(사초)를 쓴 무수한 선비 즉 史官(사관)이 바로 記者(기자)였다. 그러니 이 나라에서 기자의 전통은 서구보다 훨씬 오래고 깊다 할만하다.
사관 곧 기자의 붓은 곧아야 한다. 그것을 ‘直筆(직필)’이라 한다. 붓대가 곧아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사실을 사실대로 써야지 사실을 굽혀서 쓰지 말라는 뜻이다. 그런데 직필이 쉬운 일은 아니다. 사관이 써야 할 것은 주요한 나랏일이었는데, 근대 이전에 나랏일은 최고 권력자인 군주와 늘 관련이 있었다. 그러니 자칫하면 사관의 지위, 심지어는 목숨까지 위태로워질 수 있었다.
춘추시대 제나라 莊公(장공)은 대부인 崔杼(최저)의 아내를 탐해 최저의 집을 드나들면서 공공연히 사통했다. 이를 원통하게 여긴 최저는 기회를 엿보다가 장공을 죽이고 景公(경공)을 세운 뒤 자신이 권력을 쥐었다. 이에 대해 제나라 太史(태사)가 竹簡(죽간)에 이렇게 썼다. “崔杼弑其君.”(최저시기군) “최저가 그의 군주를 시해했다.”
이에 최저는 태사를 죽였다. 태사의 아우 두 사람도 연이어 그렇게 썼다가 죽임을 당했다.(당시에는 태사의 직위가 세습되었다.) 태사의 또 다른 아우가 다시 그렇게 썼다. 그쯤 되자 최저도 더 이상 죽이지 못했다. 세 명의 사관이 직필을 위해 목숨을 내놓았다. 이는 그만큼 사실을 엄정하게 기록해야 함을 뜻하는데, 실제로 모든 사관이 그렇게 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죽을까 두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 이 땅의 기자들도 목숨을 걸어야만 직필할 수 있는 처지에 있는가?
고전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