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 중(里-2) 쌓을 적(禾-11) 덕덕(
彳-12)
‘難勢(난세)’라는 말에는 주어진 권세를 잡도리하기가 어렵다는 또 다른 뜻도 담겨 있다. 왜 권세를 잡도리하기가 어려운가? 욕망 때문이다. 공자가 왜 천하를 주유했겠는가? 자신을 품어줄 군주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如欲平治天下, 當今之世, 舍我其誰也?”(여욕평치천하, 당금지세, 사아기수야?) 곧 “만약 천하가 평화롭게 다스려지기를 바란다면, 바로 이 시대에 나를 버리고 누가 있겠느냐?”고 말한 맹자의 호기에도 욕망은 똬리를 틀고 있다.
禮樂(예악)을 통해 어지러운 정치를 바로잡겠다는 바람도 仁義(인의)로써 민중을 위한 정치를 펼쳐야 한다는 주장도 욕망이 없이는 지탱해 나가기 어렵다. 그저 고상하고 원대한 뜻의 표현이라 여겨서는 안 된다. 대체로 타당한 목표이기에 아무도 그게 욕망의 표현이자 표출일 뿐임을 의심하지 않고, 그 자신들도 전혀 의혹을 갖지 않는데, 바로 그 때문에 타락하고 추락하기도 쉽다. 그러나 공자와 맹자는 그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다. 늘 깨어 있으려 했기 때문이다. 노자의 표현대로 ‘早服(조복)’ 곧 ‘일찌감치 따랐기’ 때문이며, 죽을 때까지 오롯하게 천리를 따르고 천도를 걸었기 때문이다.
왜 그리도 똑똑한 사람이, 이른바 배웠다는 사람이 그런 헛된 짓을, 그런 삿된 일을, 그런 부정이나 부패를 저질렀을까 하고 의아해하게 만드는 일이 많다. 그의 똑똑함이, 그의 배움이 그의 욕망을 더욱 들끓게 만들기는 했지만, 그 욕망이 곁길로 새거나 그릇된 길로 질주하지 않도록 하는 데에는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 실패의 원인은 바깥에 설정한 목표나 이상에 걸맞게 나의 덕을 갖추지 못한 데에 있다. 노자가 말한 ‘조복’을 간과한 탓이다. 노자는 말했다. “早服, 是謂重積德.”(조복, 시위중적덕) “일찌감치 따르는 것, 이것을 거듭 덕을 쌓는다고 한다.”
아무리 훌륭한 목표를 가졌더라도, 아무리 굳센 의지를 지녔더라도 내면에 ‘거듭 덕을 쌓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목표는 일그러지고 의지는 盲目(맹목)이 된다. 요컨대 욕망의 주체가 되어야 할 ‘나’가 도리어 욕망의 노예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고전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