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쓸용(用-0)의지(丿-3)바소(戶-4)향할 추(走-10)
죽지 않으려고 宮刑(궁형)이라는 치욕을 감수했던 사마천은 이렇게 말했다. “人固有一死, 或重于泰山, 或輕于鴻毛, 用之所趨異也.”(인고유일사, 혹중우태산, 혹경우홍모, 용지소추이야) “사람은 누구나 한 번 죽지만,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고, 어떤 죽음은 깃털보다 가볍다. 이는 죽음을 쓰는 방향이 달라서다.” 그는 선친의 遺業(유업)이었던 역사서를 저술하기 위해 치욕을 선택했다. 그리고 ‘史記(사기)’를 통해 태산보다 무거운 자신의 죽음을 널리 알리고 전했다.
‘用之所趨’(용지소추) 곧 ‘죽음을 쓰는 방향’에 따라서 그 죽음의 무게는 태산이 되기도 하고 한낱 깃털이 되기도 한다는 말은 지당하다. 그런데 그 죽음의 무게는 곧 삶의 무게에서 온다. 아니, 삶의 무게가 곧 그 죽음의 무게다. 비록 그 죽음이 단 한 번의 판단과 선택으로 결정되더라도 그것은 결코 한 순간, 한 때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 삶 전체에서, 길고 오랜 삶의 여정에서 차츰차츰 쌓여 온 결과였다. 경솔이나 경망, 위선 따위로 칠갑을 한 삶이라면 갑작스레 태산 같은 죽음을 선택할 수 없다. 노자가 말한 ‘重積德(중적덕)’ 곧 ‘거듭 쌓아 온 덕’이 있어야 그 삶도 죽음도 태산보다 무거워진다.
‘죽음을 쓰는 방향’은 곧 ‘삶을 쓰는 방향’이다. 나침반이 늘 남북을 향해 있듯이 사람은 누구나 그 삶을 最善(최선)을 향해 둔다. 누구도 次善(차선)이나 最惡(최악)에 두지 않는다. 그럼에도 왜 무수한 삶이 차선은커녕 下善(하선)조차 이루지 못하는 것일까? 왜 鴻毛(홍모)보다 가벼운 죽음으로 마감하는 것일까? 그것은 ‘積(적)’ 곧 ‘쌓아온 것’이 不實(부실)했거나 不當(부당)했기 때문이다.
‘문자’ ‘上德(상덕)’에 나온다. “積薄成厚, 積卑成高. 君子日汲汲以成輝, 小人日快快以至辱.”(적박성후, 적비성고. 군자일급급이성휘, 소인일쾌쾌이지욕) “얇은 것을 쌓으면 두터워지고, 낮은 것을 쌓으면 높아진다. 군자는 날마다 부지런히 힘쓰므로 영광을 이루고, 소인은 날마다 함부로 함으로써 욕됨에 이른다.”
고전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