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울 학(子-13)말 이을 이(而-0)때맞출 시(日-6)해볼 습(羽-5)
‘논어’ 첫머리는 “學而時習之, 不亦說乎!”(학이시습지, 불역열호) 곧 “배우고 그것을 때맞게 해보면, 이야말로 기쁘지 아니하냐!”라는 구절로 시작된다. 배우기를 좋아했고 또 누구에게나 배울 기회를 열어주었던 공자의 일생을 가장 잘 드러낸 구절이다. ‘논어’를 읽지 않은 사람이라도 들어본 적 있는 구절이기도 하다. 그만큼 회자되었다는 말인데, 정작 이 의미를 제대로 파악한 사람은 드물다. 그것은 ‘學(학)’의 본질, 공자가 배움을 어떻게 파악했는지를 꿰뚫은 사람이 적다는 뜻이다.
성리학의 집대성자 朱熹(주희)는 “學之爲言, 效也”(학지위언, 효야) 곧 “배움이란 말은 본받는다는 것이다”라고 풀이했다. 과연 타당한 해석일까? 본받음이 배움이란 말인가? 주희는 사람의 성품은 다 착하지만 깨달음에는 선후가 있다고 했다. 그래서 “後覺者必效先覺之所爲”(후각자필효선각지소위) 곧 “뒤에 깨달은 자는 반드시 먼저 깨달은 자가 한 것을 본받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覺(각) 곧 깨달음은 스스로 깊이 느끼고 알았다는 뜻이다. 스스로 이미 깨달았는데, 대체 누구를 본받는다는 말인가?
주자의 말대로라면 뒤에 깨달은 사람은 먼저 깨달은 사람보다 수준이 낮다는 뜻인데, 그게 말이 되는가? 이는 학문의 깊이, 깨달음의 높낮이가 아니라 나이의 많고 적음으로 수준을 가르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배움을 본받음이라 했다는 사실이다. 아직 무엇이 옳고 그른지, 어떤 것이 타당하고 부당한지 모른 채 보고 듣고 익히는 일련의 과정이 배움이다. 그래서 배움의 대상은 정해져 있지 않으며 열려 있다. 반면에 본받음의 대상은 정해져 있다.
게다가 알아야 본받을 만한지 본받아서는 안 되는지를 판단할 수 있는데, 배우지 않고서 어찌 알 수 있겠는가? 알지도 못한 채 어떻게 본받는단 말인가? 몰라도 본받으면 알게 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시키는 대로 하라는 것이고 自覺(자각)을 포기하라는 뜻이다. 공자가 과연 그런 뜻으로 ‘學而時習’(학이시습)을 말했을까? 고전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