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닐 불(一-3)대단히 역(
亠-4)기뻐할 열(言-7)어조사 호(
丿-4)
주희는 또 말했다. “旣學而又時時習之, 則所學者熟, 中心喜說”(기학이우시시습지, 즉소학자숙, 중심희열) “배운 뒤에 또 그것을 때때로 익힌다면, 배운 것이 익어서 마음이 기뻐진다.” 이는 공자의 배움을 오늘날 시험공부 수준으로 격하시킨 해석이다. 배운 것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은 채 달달 외워서 까먹지 않으면 마음이 기뻐진다는 것이니 말이다.
잘 생각해 보시라. 배운 것이 익어서 마음이 기뻐지는가, 배운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어서 기뻐지는가? 배움이 곧 앎이 아니라고 말한 적 있다. 배움은 배움이고, 앎은 앎이다. 배움은 모르는 상태에서 정보를 얻는 일이고, 앎은 그 정보가 옳은지 그른지, 맞는지 틀린지 그 성격이나 본질 따위가 확실해진 상태다. 불확실함도 애매모호함도 제거된 상태, 먹구름이 걷히고 햇살이 환하게 비치는 것 같은 경험이 앎이다.
무언지도 모른 채 배웠다고 기뻐하고, 그걸 되풀이해서 익혔다고 기뻐한단 말인가? 설령 배운 대로 따라 해서 즉 거듭거듭 실천해서 몸에 익혔다고 하더라도, 배우고 익힌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도 기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사람들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것은 배움이 곧 앎이라 여기기 때문에 기뻐하는 것일 뿐이다. 즉, 착각에 말미암은 기쁨일 따름이다. 공자는 착각도 경계했는데, 하물며 그런 기쁨을 용인했겠는가?
‘논어’ ‘爲政(위정)’에 공자가 자로에게 한 말이 나온다. “由! 誨女知之乎?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유! 회여지지호? 지지위지지, 불지위불지, 시지야) “유야! 너에게 안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주랴?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이게 앎이다.” 이 앎에 이르기 위해서 하는 것이 ‘學而時習’(학이시습)이다. 習(습)은 단순히 익히는 것이 아니다. 배운 것을 검증할 만한 때에 ‘해보는’ 것이다. 그래야 배운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방정식으로 나타내면 이렇다. 學+時習=知! 배운 것을 확실하게 알게 되는 순간, “不亦說乎!”(불역열호) 곧 “참으로 기쁘지 아니한가!” 고전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