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끊을 절(糸-6)배움 학(子-13)없을 무(亠-1)걱정 우(心-11)
이미 배우고 익힌 것으로도 감당할 수 있는 일만 겪는다면, 참 좋으련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앞으로 일어날 일들, 다가올 사태를 충분히 예상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못하다. 대화 상대의 표정이나 평소 사이가 좋던 이의 언행이 갑작스레 변하는 경우, 한창 진행하고 있는 일이 느닷없이 변경되거나 별안간 변수가 생기는 경우, 늘 믿고 있었던 사람에게서 뒤통수를 맞게 되는 경우, 그러한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당황하며 누군가를 탓하고 말 것인가? 허둥대다가 아주 그르칠 것인가? 아니면, 사태의 핵심을 파악해서 헤치고 나갈 것인가?
知止(지지)! 멈출 줄 알아야 한다! 왜 멈추라고 하지 않고, 멈출 줄 알아야 한다고 했을까? 모른 채로 멈추는 것은 억지요 버둥질이며 헛된 애씀이다. 멈추어야 함을 알아야 제대로 멈추고 참으로 차분해질 수 있다. 차분해져야 나를 어지럽히는 것들도 고요하게 가라앉는다. 고요하게 가라앉으면 편안하게 사태를 살펴볼 수 있다. 그때에 비로소 생각을 제대로 해서 사태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길을 찾아낸다. 이런 접근 방식의 요체는 배우고 익힌 것들,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지식과 정보를 내려놓는 일이다. 노자가 말한 ‘絶學(절학)’이다.
‘대학’의 한 문장을 가지고 왜 이렇게 사설을 늘어놓으며 주희까지 비판의 도마 위에 올려놓았는가는 ‘도덕경’ ‘죽간본’ 23장 때문이다. “絶學亡憂. 唯與呵, 相去幾何? 美與惡, 相去何若? 人之所畏, 亦不可以不畏.”(절학무우. 유여가, 상거기하? 미여악, 상거하약? 인지소외, 역불가이불외) “배움을 끊어야 걱정이 없어진다. ‘그렇다’와 ‘그러냐’는 얼마나 떨어져 있나? 아름다움과 추함의 거리는 얼마나 되나?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나 또한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 絶學亡憂(절학무우)! 참 절묘한 말이다. “배움을 끊으면 걱정이 없어진다”가 아니라 “배움을 끊어야 걱정이 없어진다” 배움을 끊는 일이 참으로 어려우나, 그렇다고 저절로 걱정이 없어지지 않는다. 걱정거리를 없애고 걱정할 일이 없도록 하려면 배움을 끊어야 한다.
고전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