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클 대(大-0) 그릇 기(口-13) 느릴 만(曰-7) 이룰 성(戈-3)
“그는 어릴 적부터 똑똑하고 활발했다. 아이들과 놀 때도 나무를 깎아 화살을 만들어 놀았는데,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보면 눈을 쏘려 했다. 그래서 어른들조차 그를 꺼려서 그의 집 문 앞을 함부로 지나지 못했다. 성인이 된 그는 활을 잘 쏴 무과에 급제했다. 그의 조상은 대대로 문관이었는데, 그가 비로소 무과에 올라 권지훈련원봉사에 임명되었다.”
西厓(서애) 柳成龍(유성룡, 1542-1607)이 쓴 ‘懲毖錄(징비록)’의 한 대목이다. 어린 시절부터 이순신을 잘 알고 있었던 유성룡의 글이니, 믿을 만할 것이다. 그런데 위의 내용만 보자면, 이순신이 남다른 자질과 성품을 지녀 쉽사리 무과에 급제했을 것 같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스무 살 때까지 儒學(유학)을 공부하며 문과를 준비하다가 스물두 살 때부터 무과로 방향을 틀고 무예를 배웠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오래도록 해 오던 공부를 버리고 전혀 다른 길로 가기는 쉽지 않다. 더구나 조선 시대에 문과에서 무과라니.
1572년에야 이순신은 처음 무과에 응시했다. 그의 나이 스물여덟이었다.(혼인한 지 8년 째, 아들이 둘) 그러나 訓練院(훈련원) 別科(별과) 시험에서 달리던 말에서 떨어져 왼쪽 다리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고 낙방했다. 그로부터 4년 뒤인 1576년에 다시 무과에 응시해 합격했으니, 합격자 29명 가운데 12등이었다. 무과를 준비한 지 10년 만에 거둔 결실이었다. 그러나 합격한 지 거의 1년이 지나서야 함경도 두메산골, 당시 여진족과 마주한 국경 지역으로 발령받았다. 종9품의 權管(권관, 오늘날의 소위)으로. 오지 중의 오지로 간 말단 장교. 첫 임지에서부터 이순신은 ‘大器曼成(대기만성)’ 곧 ‘크나큰 그릇은 더디게 이루어짐’을 보여주었다. 그는 성실하게 근무하며 차근차근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 방어체계를 확고히 했고, 그 덕분에 2년 뒤 승진해서 漢城(한성)의 훈련원 봉사(종8품)가 되었다. 강직한 성품으로 원칙대로만 한 탓에 적지 않은 적을 만들었으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순신은 타고난 영웅이 아니라 꾸준히 자신의 그릇을 키운 대장부였다.
정천구 고전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