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이 없는 대신 모두가 주인이 될 수 있는 '공간 초록'. 부산교대 옆 주택가 골목길을 따라 들어가면 '공간 초록'을 알리는 예쁜 간판이 달린 집이 나온다. 윤민호 인턴기자

눅눅한 장마 기운이 무겁게 짓누르던 지난 22일 저녁. 부산 연제구 거제동에 위치한 '공간 초록'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는 듯 분주했다.

"아, 어서오세요" "진짜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셨어요?" 작은 대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들끼리 인사가 오갔다. 곧이어 탁자 위에 하얀 떡이 올려졌고, 한쪽 구석에서는 작은 장터가 벌어졌다. 헌옷부터 집에서 만든 허브 비누, 작은 손수건까지. 좁은 방은 금세 북적였고, 장을 펼치자 마자 바로 '팔렸음' 딱지가 붙기 시작했다.

저녁 7시 50분. 불이 꺼졌다. 이 날은 공간 초록에서 열리는 작은 영화제 '초록 빛을 쏘다' 첫 상영일. 부산청년환경센터, 구들장, 부산녹색연합, 습지와 새들의 친구 등 네 개의 환경단체가 주최한 환경 영화제다. 30여 명의 관람객들은 방과 마루에 편안하게 자리 잡고는 핵 문제를 다룬 영화 '동경 핵발전소'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이들은 두 시간에 걸친 영화 관람 후 환경 보호를 의미하는 밀랍 초를 켜고 토론을 시작했다. 고리원전 1호기와 관련된 논란들로 이들의 방담은 밤 늦도록 이어졌다. 부산청년환경센터 활동가 박경배 씨는 "앞으로 매월 셋 째주 금요일 작은 영화제를 열 생각"이라며 "공간 초록이 없었으면 이런 시도도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공간 초록? 도대체 뭐하는 곳이지?


# 주인 없는 열린 공간

'어디더라….' 작은 영화제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공간 초록을 찾아 나섰다. 분명 초행길이 아닌데 골목길에 들어서자 헷갈리기 시작했다. '이 길이었던가' '아니, 저 쪽이었나?'. 다행히 크게 헤매지 않고 찾았다. 작은 나무판에 삐뚤빼뚤 쓰여진 '공간 초록'이라는 글자가 반가웠다.

'공간 초록'은 참 재미있는 곳이다. 평범한 주택가의 식당을 개조해 소리없이 들어앉은 이 곳에는 주인이 없다.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주인없는 가게'처럼 단지 주인이 자리에 없는 것이 아니라 정말 주인이 없다. 주인이 없으니 문을 잠궈 둘 필요도 없다. 그럼, 집 계약은 누가하고, 누가 이렇게 아담하게 꾸며 놓았을까? 이런 궁금증은 이 곳의 탄생 과정을 되짚어보면 풀린다.

주인 없는 공간을 제안한 사람은 천성산 지킴이로 잘 알려진 지율 스님. 지난해 초 단식으로 자신의 몸도 제대로 추스를 수 없었던 스님은 '도심 속 열린 소통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며 주변 사람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부산에서 환경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같은 고민을 하며 의사소통 할 수 있는 공간이 없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신 것 같다"는 것이 부산지역 환경 소모임 '구들장'의 정중효 씨 설명이다.

지율 스님의 제안에도 불구하고 실제 꾸려지기 까지 적잖은 진통이 있었다. 주인 없는 곳이 제대로 운영이 되겠느냐, 엉망이 될 지도 모르니 아르바이트 생이라도 쓰면서 관리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등 곳곳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기 때문.

우여 곡절 끝에 스님의 뜻에 공감하는 25명이 모여 일정 비용을 갹출해 집을 구했다. 습지와 새들의 친구 박중록 운영위원장의 말에 따르면 당시 각종 소송에 휘말려 있었던 데다 습지와 새들의 친구 사무실이 부산교대 앞에 있어 법원과 가까운 교대 앞으로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막상 둥지가 마련되자 많은 사람들의 지원 손길이 이어졌다. 지율 스님이 직접 톱과 망치를 들었고 자원봉사자들이 내 일처럼 힘을 보탰다. 두어 달이 지나자 기름때 가득했던 식당은 꽃내음 가득한 푸른 공간으로 탈바꿈 했다.


# 녹색 소통의 꿈

보통 어떤 단어를 수식할 때는 수식어를 앞에 두기 마련. 그렇다면 '공간 초록'이 아니라 '초록 공간'이 되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다. 왜 굳이 '공간 초록'이라 이름 했을까. 여기에는 원래 초록색으로 채워진 공간이 아니라 비워진 곳을 초록으로 채우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이렇듯 이 곳은 지난 해 8월 문을 연 후 환경을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들의 쉼터로, 토론공간으로, 문화행사장으로서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모일 때마다 여러 곳을 전전해야 했던 환경·시민단체들은 이제 기러기 생활을 접고 '공간 초록'에 정착하게 됐다. '구들장'의 정중효 씨는 "우리 단체는 매번 장소를 옮겨다녀야 했는데 공간 초록이 생겨 더할 나위 없이 좋다"고 말했다.

이 곳을 정기적으로, 혹은 간헐적으로 활용하는 단체는 15개 정도. 홈페이지(www.spacechorok.org)를 통해 방잡기 신청을 하면 누구나 사용할 수 있다. 습지와 새들의 친구의 '외국어 생태공부방'(매주 수요일 저녁)을 비롯해 각종 행사들이 쉼없이 이어진다. 초중고 교사들의 시 동호회 모임도 이곳에서 열린다. 지난 15일에는 지율 스님까지 참석한 작은 장터가 열렸고 22일부터 '작은 영화제'가 펼쳐졌다. 환경·시민단체들의 이같은 활동은 비어 있던 '공간 초록'을 초록색으로 물들였다.

지난 22일 '공간 초록'에서 마련된 작은 영화제 '초록 빛을 쏘다' 상영에 앞서 열린 장터 모습. 윤민호 인턴기자

# 시민단체들의 둥지

지난 15일 공간 초록에서는 운영위원 모임이 열렸다. 흔히 알고 있는 운영의 주체라기 보다는 처음 문 열었을 때 십시일반 도움을 준 사람들이 모인 것이다. 이들이 문을 연지 거의 1년 만에 다시 모인 이유는 '공간 초록'의 운영이 다소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매월 집세와 전기세, 수도세 등으로 80만 원이 나가는데, 자발적인 후원만으로는 한계에 이른 것. 마라톤 회의 끝에 이들은 운영 방식을 대폭 바꾸기로 결정했다. 방잡기를 하려면 1만 원을 내야 했던 기존의 규칙을 없애고 누구나 홈페이지에 가입하고 신분만 밝히면 방을 잡을 수 있도록 했으며, 대신 100명 후원인 모집에 나서 운영 비용을 충당하기로 했다. '구들장' 정중효 씨는 "모두에게 열린 공간이라는 당초의 목표를 더욱 살리자는 의미에서 이렇게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주인이 없지만 누구나 주인이 될 수 있는 '공간 초록'. 후원인 모집 등 정착을 위한 해결 과제가 남아 있긴 하지만, '열어 두고 통하게 하는 공간'이란 개설 취지와 그러한 시도는 소중하게 와닿는다. 특히 이 공간을 사랑하는 '녹색 마음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으니 그 시도는 이미 절반의 성공을 거두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