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팩토리 숨'은 모든 예술인들이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있는 자유로운 공간이다. 사진은 서봉리사이클링(주) 문정현 회장과 '아트팩토리 숨' 입주 작가들이 작업실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는 모습(가운데)과 '숨' 내부 전경. 김성효 기자 kimsh@kookje.co.kr

굴뚝마다 피어나는 연기, 흙먼지 일으키며 달리는 대형 트럭들, 길 가에 아무렇게나 쌓여있는 자재들. 그 곳은 영락없는 공장지대였다. 맞은편엔 아스라이 넘어가는 저녁노을이 장관을 이루는 다대포 바다가 펼쳐져 있지만 길 건너편에 자리잡은 무지개 공단은 그저 삭막한 공단일 뿐이다. 이런 곳에 예술인들의 창작공간이 마련돼 있다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낙동강 강변도로를 한참을 달리다 무지개공단 내 기계2단지 간판이 눈에 띄었다. 골목 하나를 돌아 들어가니 '서봉리사이클링(주)'가 보였다. 이 회사는 건설폐기물 중간처리업체다. 이곳에 국내 최초 다원예술 레지던스 (예술가 주거 공간)인 '아트팩토리 숨'이 뜨겁게 숨쉬고 있다.

아트팩토리 숨

폐기물 처리가 한창인 넓은 공터를 지나 2층짜리 건물로 들어섰다. 사무실에서 몇 개의 문을 지나 들어가니 갑자기 1000여 평의 텅 빈 공간이 펼쳐졌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미완성인듯한 예술작품들. 입구에 들어올때 까지만해도 정말 이 곳에 예술인들의 공간이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가졌지만, 한발 한발 내딛을수록 이런 의구심은 잦아들었다. '아, 공장이 이렇게 변했구나.'

10여m를 걸어들어가니 파티션으로 구분 지어놓은 작업공간이 나타났다. 텅 빈 공간을 나름대로 알뜰살뜰하게 나눠 개인 작업실을 만들어놓은 것. 10여 개의 공간에선 작가 개인들의 개성이 묻어났다. 벽면을 작업 스케치로 도배를 해놓은 곳도 있었고, 설치 작품으로 발디딜 틈이 없는 공간도 있었다. 또 작품들을 차곡차곡 쌓아 정갈하게 정리해놓은 작업실도 있었다. 맞은편에는 여성용과 남성용으로 구분지어 놓은 숙소를 알리는 작은 명패가 붙어 있었다.

'아트팩토리 숨'은 어떻게 이 삭막한 공장지대 한가운데에 들어서게 된 것일까. 이에 앞서 '문화소통단체 숨'은 지난 2월 부산발전연구원과 '비전과 연대21'이 주최한 '문화도시 부산21' 콜로키움에서 하얄리아부대를 '문화·예술 공원'으로 만드는 안을 내놓았다. 하지만 내용의 실현 가능성 여부를 떠나 하얄리아 부대 이전 작업을 마냥 기다리기에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다. 그래서 이 프로젝트를 빨리 실현할 수 있는 대안을 찾았고, 그 과정에서 서봉리사이클링의 문정현 회장을 만났다. 그동안 시민·사회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온 문 회장은 이야기를 듣고 젊은 예술인들의 꿈을 피워주고자 흔쾌히 공장 부지를 내놓았다. 그 후 9월부터 조성 사업이 본격화돼 10월 입주 작가가 선정되고 추진위원회가 발족되면서 '아트팩토리 숨'이 가동되기 시작했다.

현재 이 곳에 둥지를 튼 예술인은 모두 31명. 15명의 개인 활동가와 스트리트 댄스팀 두 팀이 이 곳에서 꿈을 키워가고 있다. 변대용 정규옥 김진휘 이도훈 조종성 김현진 오현주 박준화 이재원 등 회화나 조소, 설치 등 미술 전공자들이 대대수이지만, 애니메이션(김윤섭)과 무대미술(김재한), 사진(채경, 스캇맥마스터) 전공자들도 있다. 또 킵더페이스, 킬라몽키즈 등 부산에서 활동 중인 스트리트 댄스 팀도 자유로운 연습 공간을 찾아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공장 내에는 작업실과는 별도로 이들을 위한 연습실도 갖춰져 있다. 대부분의 레지던스 공간이 모두 미술작가에 국한되어있던 것에 반해 이곳은 말그대로 모든 예술인들에게 열려있는 공간인 셈이다.

젊은 예술인들의 요람

부산 경남 출신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구성원을 들여다보니 놀랍게도 부산지역 예술인은 1/3에 불과하고 다른지방에서 알음알음으로 찾아온 이들이 절반을 넘는다. 이들은 이곳에 입주하기 위해 3대 1의 경쟁률을 뚫었다. 서울에만해도 국가의 지원을 받는 레지던스 공간이 5곳이 넘는데 굳이 이곳으로 찾아온 이유는 뭘까. 더군다나 아무것도 갖춰지지 않은 허허벌판에서 작은 것 하나하나를 새로 만들어야 하는 열악한 상황인데도 말이다.

김윤석(25) 씨는 타지방에서 '숨' 개소 소식을 듣고 혈혈단신 부산으로 날아왔다. 충청도에서 나고 자란 김 씨가 이곳에 온 이유는 복잡하지 않다. 별도의 비용을 들이지 않고 자유로운 작업 공간을 확보할 수 있는 점이 무척이나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정도 크기의 작업실을 구하려면 비용이 엄청 들어요. 더군다나 도심에서는 주변의 소음 때문에 작업에 집중하기도 힘들죠. 하지만 여기선 그렇지 않아요. TV도 없고, 숙소에서 나오면 바로 작업공간이기 때문에 게을러 질 수도 없습니다."

김현진(25) 씨도 마찬가지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닌 김 씨는 이 곳에 예술인들의 공간이 생긴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지원했다. "하루에 다섯 시간 이상씩 작업에 매달려요. 다른 분들이 워낙 열심히해 서 자극이 되죠. 다른 작가들과 작품이야기도 많이 나눌 수 있고, 그 과정에서 충고도 받게 돼 혼자 작업할 때보다 더 발전적인 것 같아요."

입주 작가들에게는 적게는 10평, 많게는 30평의 개인 공간이 주어지는데, 최장 2년까지 있을 수 있다. '문화소통단체 숨'의 차재근 대표는 "이렇게 넓은 공간을 제공하는 곳은 전국에서도 찾기 어려울 것"이라고 귀띔했다.

넓은 공간만큼이나 입주 작가들의 구미를 당기는 것은 일체의 간섭이 없는 자유로운 작업 분위기와 무료에 가까운 입주 비용. 월세는 당연히 없고, 아직까지는 전기세 등의 기본적인 유지비도 내지 않는다.

운영은 운영위원회의 도움을 받는다. 운영위원회에는 위원장 김태만 해양대 교수를 비롯해 김봉수 방송위원회 시청자미디어센터장, 정희준 동아대 교수, 송성준 SBS보도본부 부산지국팀장, 안웅희 해양대 교수 등 각계의 전문가 10여 명이 고문과 위원으로 참가하고 있다. '문화도시 부산21' 콜로키움 등에서 인연을 맺은 이들은 유·무형의 도움을 통해 '숨'에 숨결을 불어넣고 있다. 지난 주에는 이경훈 부산시 정무부시장이 이 곳을 둘러보기도 했다.

10년을 내다보다

문을 연지 이제 2개월. 그래서인지 아직은 2% 부족하다. 지금은 1000여 평의 넓은 공간을 채우는 것만 해도 벅차다. 입주 작가가 적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파티션 하나를 만드는 데에도 층고가 높고, 워낙 아무것도 없던 텅 빈 공간인 관계로 비용이 더 들어가기 때문이다. 안쪽 공간에 갤러리를 만들려고도 시도했지만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 포기했다고 한다.

다원예술공간이라는 이름은 내걸었지만 미술 작가들이 대부분인 점도 아쉽다. 차재근 대표는 "연극인들을 위한 연습 공간도 확보해 뒀는데 지원자가 없는 것이 안타깝다. 앞으로는 더 많은 분야의 예술인들이 모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열악한 주변 환경 때문에 애써 뽑은 입주 작가들이 포기하고 나가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원활한 운영을 위해선 상근 직원이 있어야 하는데 운영비가 문제다.

그럼에도 다급하진 않다. 지금 당장은 불편한 데가 많다 해도 10년 후에는 예술인들을 위한 멋진 아지트가 될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멀리 내다보고 작가들이 장기적으로 먹고 살 수 있도록 여러가지 프로젝트를 구상 중이다. 내년 초에는 공장 주변 사람들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프로그램도 준비해 본격적인 대외활동을 시작할 계획이라고 한다.

"사실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지 않는 이상 하나하나 바꿔가는 수밖에 없어요. 최소 10년은 돼야 자리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때까지 다같이 고생하는 거죠 뭐.하하."(차재근)


# 공장 쾌척, 서봉리사이클링 문정현 회장

- 예술은 또 다른 생산활동 소비상품화 전락 아쉬워 2층 빈공간도 갤러리 만들 것

서봉리사이클링(주) 문정현(55·사진) 회장. 하얀 눈이 내려앉은 것 같은 백발이 성성한 머리에 편한 캐주얼 차림의 문 회장은 사람좋은 동네 아저씨 같았다. 하지만 그는 자본금 25억 원의 서봉리사이클링을 비롯해 서봉종합건설(주), 명신개발 등을 함께 운영하는 기업인이다. 더군다나 문화·환경 분야 지원에 있어 그는 누구보다 통이 크다. 부산시100만평 문화공원 조성사업에 매출액의 0.1%를 기부하고 있으며 낙동강 생명찾기 운동, 온천천살리기 운동에도 후원하고 있다. 그런 후원 정신으로 이번에 1000여 평의 공장부지를 예술인들을 위해 내놓았다.

"부산에 공장이 없어서 난리라고 하던데 조금 민망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도 작가정신은 있지만 돈이 없어 작업 공간을 구하지 못하는 이들을 위한 공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공장을 내놓게 되었습니다."

문 회장은 자신은 예술에 대해선 아는 것이 별로 없다며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모든 문화가 소비의 측면에서 다루어지는 현실이 안타까웠다고 했다. 그래서 순수하게 열정으로 똘똘 뭉친 이들을 지원하기로 나섰다는 것이다.

"갤러리 보세요. 쇼핑센터에서 쇼핑하듯 예술 작품들을 사고 팔잖아요. 모든 문화를 소비·상품화 하는 것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예술 활동을 순수하게 생산이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 공장에서 예술인들이 작업을 하는 것이 어떨까 생각했죠."

그는 처음 공간을 내주면서부터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웠다. 두 달이 지난 지금도 이 생각엔 변함이 없다. 그리고 이왕 지원하는 김에 2층의 비어있는 공간에 갤러리도 만들 계획이다.

"아랫층 작업 공간에 난방 시설도 설치하고 2층에는 판넬로 갤러리를 만들 생각입니다. 그러면 명실상부한 예술인들의 공간이 되지 않을까요."

자신이 살아있는 한 계속 작업 공간을 제공할 생각이라는 문 회장은 공장 근처에 독거노인을 위한 복지시설을 세우는 것도 꿈이라고 말하며 밝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