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거리를 일로 생각해 목적지만 찾아나서는 여행자보다는 갈 곳이 많아 놀이로 돌아다니는 나그네가 훨씬 많은 것을 본다. 저명한 중국의 수필가 임어당은 그의 저서 '생활의 발견'에서 여행에 관련된 이야기 한 토막을 소개한다.
중국 여행에서 중국 친구들과 등산을 함께한 미국 부인. 등산 당일 안개가 짙어 산을 오르는 도중에는 물론 정상에 올라서도 희미한 산 능선 외에 보이는 것이 없자 '기대했던 중국 등산에서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고 참았던 불만을 중국 친구들에게 털어놓았다. 이에 중국 친구가 웃으며 던진 한마디. "우리들은 아무것도 볼 수 없는 등산을 좋아 한다네."
필자가 교환 교수로 미국에 가서 미술 전공 대학원생들에게 '동서양 미술 비교'라는 특강을 한 적이 있었다. 첫 번째로 보여준 작품이 '그림 감상'이란 제명의 단원 김홍도 그림. 유생(선비) 여러 명이 축으로 펼친 한 폭의 그림을 둘러싸고 그림을 감상하는 광경을 그린 평범한 그림이었다.
미국 학생들이 낯설게 느낄 것이라고는 유생들의 행장인 유건(모자), 장죽(담뱃대), 그리고 목화(신발)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제명을 말하는 순간 손을 번쩍 들고 질문을 던지는 학생이 있었다. 축으로 펼친 그림이 그냥 백지인데 그것을 보고 무슨 '그림 감상'인가 하는 것이었다. '백지'라는 사실 확인에 '그림'을 그림으로 보는 눈을 잠시 접은 이들에게 필자는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떠올려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고, 종내는 임어당이 소개한 미국 부인의 등산 이야기까지 덧붙여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일찍부터 비행기 조종사로 하늘과 인연을 맺은 생텍쥐페리. 그가 비행에서 마주하는 풍경은 이륙과 착륙의 순간을 빼고는 구름과 별 이외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창공이다. '어린 왕자'의 탄생도 현실과 유리된 창공을 가로지르는 침묵의 여정에서 비롯된 자신의 웅얼거림의 하나로, 그 핵심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 때문에 주변의 모든 사물이 비로소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존재로 다가온다는 점에 있다.
그의 비행기가 엔진 고장으로 불시착한 곳은 창공과 다를 바 없는 막막한 사막. 거기에 홀연히 등장한 '어린 왕자'로부터 영문도 모를 애원조의 웅얼거림을 듣게 된다.
"아저씨…, 나 양 한 마리 그려 줘." 어릴 적 그림을 일찍 포기한 생텍쥐페리는 연이은 어린 왕자의 웅얼거림에 하는 수 없이 한두 번 양을 그려보여 주지만 어린 왕자는 그때마다 자기가 생각한 양이 아니라며 고개를 내젓는다. 마지막으로 내팽개치듯 그려 준 것은 양이 아닌 구멍뚫린 상자. "이건 상자야. 네가 갖고 싶은 양은 이 속에 있어." 종이를 받아 든 어린 왕자가 뜻밖에 환한 표정으로 이렇게 중얼거린다. "아저씨, 상자 속의 양에게 풀을 많이 주어야할까…. 아! 어느새 양이 잠이 들었네."
현란한 모니터에 모두가 눈과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요즘, '어린 왕자'야말로 우리의 눈과 마음을 별들의 반짝임만이 있는 드넓은 시공을 향하게 해서 '나 하나 별 하나'의 응얼거림을 가능케 한 진정한 나그네가 아니던가.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