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 가정 아이 3명이 검은 맹견과 정신병원에서 탈출한 할아버지와 함께 막걸리 운반 차량의 짐칸에 동승하게 된다. 그들은 왜 거기에 모였는지 알아볼 틈도 없이, 고난과 모험의 행군으로 한반도의 반을 세로 지른다. 그들은 시대에 쫓기고 사람에 쫓기고 약속 시간에 쫓기고 악몽 속에서 스스로에게 쫓긴다.
광주에서 시대의 아픔을 만나고, 동행하던 소녀에게선 눈뜨기 시작하는 이성을 만나고, 할아버지의 순혈한 꿈을 만나고, 검둥개까지 같이 가야할 공동의 동지애를 만나고, 비오는 한국의 산하를 만나고, 마침내 남도의 끝 무인도에서 태풍을 만나고 고래를 만난 뒤 피신하는 운동권 형을 도피시킴으로서 이들의 여정은 끝이 난다.
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는 청소년 문학상을 받은 장편소설이지만 어디 청소년만을 위한 글인지 한 번 들여다보자.
'그 시점에서 나는 인간의 존엄성을 버리고 말았다. 자존심도 버리고 투쟁심도 버렸다. 남은 건 미쳐 날뛰는 검둥개의 목을 붙들고 목숨을 구걸하는 구차한 혓바닥뿐이었다'. '어디로 가는지 누가 알랴. 언제 돌아볼 새가 있었다고 할아버지를 따라 무작정 달리고 있을 뿐인데 이때 이유 있는 인간들이 등장한다'.
작가는 인물과 상황을 극단까지 몰아간다. 상황의 한계에 부딪혀 아! 하고 입을 벌리는 순간 그 속으로 밀려들어가 몸속에서 울리고 머리 꼭대기로 치고 올라가 분수처럼 킬킬거림이 퍼져나가야 문장은 끝이 난다. 그렇게 메가톤급 신파를 한방 먹고 나면 신뢰라는 것이 싹터 '그래, 스토리의 끝에서 끝까지 다 읽어 주리라' 다짐하게 만든다.
그녀(작가)의 글은 집단의 부조리와 상황의 극단 속에 최선을 다해야만 볼 수 있는 것을 보고 있다. 어쩔 수 없는 생명의 조건을, 그 어떤 상처보다 깊은 상처를 견뎌낸 강한 무관심으로 광범위한 연상능력을 발휘하여 자유롭게 야유한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문체는 따뜻하고, 우월하지 않다. 뻔한 인성이나 감정묘사는 안한다. 새로운 지식의 설명은 친절하다. 하지만 뒤돌아보지 않게 할 만큼 깔끔하고 경쾌하다. 이러한 그녀의 문체는 곧 이 시대를 살아가는 훌륭한 한 모델로 인식되기 시작한다. 그렇게 해서 나와 아무런 상관없는 한 인생의 행로에 빠져든다.
누구나 나이를 먹으면 청소년기의 성장통을 벗어났다고 생각하는 것에는 오류가 있으리라. 인생은 해결이 돼서 넘어왔다기 보다는 한 시기를 견뎌내 잊고 살아가게 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그 의문이 다시 찾아들면 마치 처음처럼 그 시절을 되돌아보게 되는 것은 아닐까. 유명한 성장소설('데미안', '아웃사이더' 등)들이 그러하듯, 놓치고 있던 인생의 어떤 진정성을 일깨워준다고나 할까.
3월이다. 언 땅은 녹고 꽃은 핀다. 어린아이보다 못한 어른들이 권력을 다투고, 아이들이 어른 흉내를 내는 게 아니라 어른들이 아이들 흉내를 내고, 새로운 변화들이 기성, 신인 할 것 없이 함께 덮쳐 요동을 친다. 이 와중에 다른 약속 제쳐두고 숨겨둔 곶감 빼 먹듯 며칠 연애를 했다. 그녀와의 또 다른 날들도('7년의 밤' '내 심장을 쏴라')도 그렇게 추억 속에 흘러갔다. 그녀와의 새로운 만남을 잊고 열심히 살아야겠지. 그리해야 어느 해 베스트셀러 진열장에서 다시 그녀의 피눈물을 발견하고 난 또 지구의 한 모퉁이에서 시름없이 킬킬거릴 수 있는 열린 눈을 유지할 테니까.
연극배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