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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벤스의 '박사들의 방문'. |
계사년 새해가 시작되면서 세상은 크리스마스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새해를 중심으로 분주하지만, 교회는 아직도 성탄시기를 지내고 있다. 교회는 통상 예수성탄대축일부터 예수의 공현대축일까지 약 2주 동안 예수의 탄생을 기념한다.
예수의 출생 소식을 전하는 루카복음(1,7)은 여관에 방이 없어 베들레헴의 마구간에서 태어난 예수를 구유에 뉘었다고 한다. 그 구유의 모습은 성당이나 교회에 가면 어디서나 볼 수 있다. 처음에는 구유에 예수와 양친, 몇몇 목동과 가축들의 조각이 놓여 있다가 공현대축일이 되면 왕의 모습을 한 세 명의 박사들이 등장한다. 이는 마태오복음(2,1-12)에 근거한 것으로 헤로데 대왕 시절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예수가 동방박사의 방문에 의해 공적으로 세상에 드러남을 의미한다.
세 명의 동방박사가 베들레헴을 정말 찾아왔을까를 논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이 또한 복음서의 전사(前史)에 속하는 대목으로써 신화적 요소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오늘날까지 이 이야기를 토대로 크리스마스 구유에 동방박사들을 등장시켜 예수 성탄 사건의 중요한 부분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선민으로 자처하던 유대인들이 무관심하고 있을 때, 하느님은 멀리 이방인들을 불러 세상의 왕을 찾아보게 하신 것이다.
원래 태양신의 탄생일이었던 12월 25일을 로마교회가 4세기부터 세상에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대체한 사실은 널리 알려진 바다. 동방교회는 세 명의 박사들을 이름하여 카스팔, 멜키올, 발타살이라 부르고, 이들이 찾아온 사실을 기념하는 로마교회의 공현대축일을 진정한 의미의 성탄대축일로 지내고 있다.
오직 하늘에 떠오른 별을 보고 왕을 찾아 경배하겠다는 일념으로 신앙의 긴 여행을 시작했던 동방박사들의 순수하고 착한 마음은 충분히 모든 신앙인들의 표본이 된다. 네비게이션은 물론 지도조차 없던 그 당시, 먼 여행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한 가닥 별빛과 그 별이 의미하는 미지의 왕에 대한 희망과 꿈으로 부풀어 있었으니, 사실상 자기들의 남은 인생을, 자기들의 모든 것을 미지의 왕에게 내걸었던 것이다. 공현대축일은 예수의 탄생을 눈으로 볼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구유 세트에 등장해야 할 인물들이 완성되었음을 말한다. 문득 여기에 빠진 사람은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구유에 두 사람이 아직 빠져있다. 바로 우리 자신과 헤로데 대왕이다. 나 자신도 구유 속에 실제 인물로 등장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아직 헤로데 대왕은 보이지 않는다.
주님의 탄생을 준비하고 맞이하면서 이 놀라운 사건을 처음부터 함께한 나 자신도 그들에 끼여 예수님을 경배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림기간 동안 성탄 준비에 소홀히 했다면 나는 필시 구유에서 멀리 떨어져 방황하고 있을 것이다. 합당한 준비 없이 성탄을 맞이하여 구유 앞에 왔다면 성탄축일도 공현축일도 그만큼의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하지만 나 또한 오늘 이 구유의 마지막 등장인물로서 그리스도 강생의 신비를 보다 깊이 묵상하고 종합하여 마음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신앙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와 온 인류의 구세주이심을 고백한다. 자신의 왕좌에 위험을 느낀 헤로데 대왕은 "나도 가서 경배하겠소"라고 내뱉은 약속을 아직도 지키지 못하고 있다. 동방박사들이 헤로데에게 아기 예수에 대한 정보를 주지 않고 각자 자기 고향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헤로데가 기회를 놓쳤을 것이라는 생각은 핑계에 불과하다.
오늘도 헤로데 대왕과 유사한 이유로 구유에 나아오지 못한 신자들을 아기 예수는 아직도 기다리고 계실 것이다.
천주교 몰운대 성당 주임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