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영화의전당에서 강연 하나를 하다가 그만 칸트의 정언명령이라는 표현을 써버렸다. 사실 안 해도 될 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한 뒤풀이 자리에서 농담 섞인 핀잔이 날아들었고 "그런 말은 왜 했냐"고 동료들은 킬킬댔다. 역시나 안 해도 될 말이었다.
우디 앨런의 영화 '이레셔널 맨'의 한 장면을 보다가 그 일이 생각났다. 주인공 에이브는 과격하면서도 진보적인 철학교수다. 그가 학생들에게 칸트의 정언명령에 대해 삐딱하게 가르치고 있다. 정언명령이라는 게 누구나 예외 없이 지켜야 하는 보편적인 도덕 준칙이라면, 그러니까 조건이나 가정이나 목표 등이 전제된 가언명령이 아니라 그 자체로 절대적으로 지켜져야 할 무엇이라면 다음과 같은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그는 묻는다. 나치가 우리들의 집을 찾아와 '유대인인 안나 프랭크의 가족을 다락방에 숨겨 놓았느냐'고 물으면 우리는 거짓말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도덕적 정언 명령을 따르기 위해 '그렇다. 그들이 저기 있다'고 말해야만 하느냐는 것이다. 그런 도덕은 엉터리라는 거다. 철학은 언어적 자위라고 그는 말한다.
흥미로운 점은 언어적 자위라고 멸시했던 도덕의 명령을 에이브 그 자신이 충실히 따른다는 데 있다. 부패하고 폭력적인 판사의 판결로 억울하게 아이들을 빼앗길 위험에 처한 한 여인을 위해 에이브는 그 판사를 살해할 결심을 하고 실제로 이행한다. 요컨대 '정의는 실현되어야 한다'는 그 보편타당한 도덕적 준칙을 위해 에이브는 살인을 불사한다. 더하여 그는 이 살인을 두고 "완전범죄라는 창조적 도전"이라며 흥분한다.
더 흥미로운 건 그 뒤부터다. 에이브의 행동은 그를 사랑한 여학생 질에게 들통난다. 하지만 그와 그녀의 관계는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와 소냐의 관계가 되지 못한다. 질은 에이브에게 자수를 권하며 그렇지 않으면 신고하겠다고 말한다. 그러자 에이브는 자신이 살기 위해 질을 살해할 계획을 세운다. 영화는 이때부터 갑자기 허술해지고 에이브가 질을 살해하려다 실패하는 장면은 허술하다 못해 우스꽝스럽게 보일 정도다. 도덕을 추구하다가 빗나가 버린 비극적 결과와 그 아이러니. 우린 이 영화를 그렇게 요약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극히 자기 파괴적인데다 죽음과 겨루기 위해 러시안 룰렛까지도 서슴지 않았던 이 사내가 자신의 남은 생에 저토록 집착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도덕의 아이러니만으로는 어딘지 설명이 잘 안된다 . 다른 설명이 필요한 것 같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버둥거리다 죽어 가는 에이브를 보고 있노라면 다른 '절대'가 있었음을 알게 된다. 에이브 자신이 실천할 수 있다고 믿은 건 형이상학적 도덕에의 의지이지만 정작 그를 지배하고 조종하는 것은 철저하게도 형이하학적인 사태들이다. 그가 무엇을 밟고 미끄러져 죽게 되는지 관객은 떠올리게 될 것이다. '이레이셔널 맨'은 허술하다. 그럼에도 우디 앨런은 칸트의 정언명령 같은 형이상학적인 말로 시작해 엘리베이터 앞의 허둥지둥 살인극과 같은 형이하학적인 참극으로 끝낼 줄 아는, 몇 안 되는 이야기꾼이다.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