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이 사랑하는 팝송 애창곡 몇 편 하는 식으로 한국인이 사랑하는 외국 명화 몇 편 이라는 리스트를 작성하되 근 10년 내로 한정하기로 한다면 거기에 일본 영화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작품들은 다수 속할 것이다.
최근작 '태풍이 지나가고'에 이르기까지 그의 영화는 빠짐없이 국내 개봉됐고 개봉과 함께 낙오 되어 버리는 동류의 영화들에 비한다면 늘 오래 생존하면서 사랑받았다.
다만 개인적인 인상 하나를 적자면, 그의 영화는 지금 한계에 봉착했다. 텔레비전 드라마의 두 시간짜리 버전인 것처럼 보이는 영화들의 양산, 이것이 근래 고레에다 영화의 불운한 특징이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나는 그의 영화에 비판을 던지고 싶은 의지가 별로 없다. 그의 한계는 처음부터 명확했고 그는 늘 자신이 할 만큼만 하고 있으니 더 무언가를 재촉할 건 없어 보여서다. 차라리 흥미로운 점 한 가지를 말해보자.
키키 키린이라는 배우의 지속적인 등용이다. 나는 '태풍이 지나가고'가 전작 '바닷마을 다이어리'보다 훨씬 더 뛰어난 이유가 키키 키린이 등장하는 장면 분량이 훨씬 더 많기 때문이라고 우기고 싶을 정도다. 이 노년의 여배우가 일본에서 저명하다는 사실 정도만 알고 있을 뿐 나는 그녀에 관하여 더 잘 알지 못한다. 그녀의 경력을 상세히 탐색하고 검색하고 싶은 마음도 별로 없다. 이상하게도 유독 그녀가 비범해 보이는 것은 고레에다 영화에 출연할 때이므로 내게 키키 키린은 고레에다의 키키 키린이다.
고레에다가 존경해 마지않는, 물론 너무 존경한 나머지 그 영향력을 때때로 부인하기도 하는 일본의 감독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에는 스기무라 하루코라는 여배우가 자주 등장한다. 시집 못 가고 아버지를 모시는 나이든 딸, 눈치 없는 이웃집 여인, 친밀한 것 같지만 실상으론 그다지 도움 되지 않는 친척 중 누군가로 곧잘 나온다. 개인적인 추론이지만 오즈는 배우들의 신체 연기를 그다지 믿지 않았다. 그들의 몸은 늘 제약 안에 있었다. 하지만 스기무라 하루코 동작들은 놀랄 정도로 완벽한 리듬감을 지니고 있어서 감정적으로 충만하다.
새삼 키키 키린과 스기무라 하루코의 연기 방식을 비교하려는 것이 아니고 또한 두 배우가 같다는 뜻도 아니다. 두 감독의 영화에서 이 여배우들의 가치가 비교 대상이 될 정도로 동일하게 높다는 뜻이다. 고레에다의 진정한 걸작 '걸어도 걸어도'의 비범함은 대개 극중 어머니 역할을 맡은 키키 키린에게서 나왔으며 '태풍이 지나가고'가 볼 만한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면 그것 또한 전적으로 이 작품에서 어머니 역할을 맡은 키키 키린의 덕분이다.
키키 키린은 의심 많은 관객을 무장 해제시키는 데 비범한 재주가 있다. 편하고 느긋하게 뭉개는 말투, 재치 있고 엉뚱하게 화제 전환하는 순발력, 알지만 모르는 척 속아주는 아량, 엇박자로 조금씩 흔들거리는 몸. 그녀는 대개 모든 장면에서 편하고 친밀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정작 더 놀라운 점이 있다. 평범함과 친밀함이 유지되는 가운데 돌연 등장하곤 하는 그녀의 잔혹함과 뻔뻔함은 우리의 삶의 통속이 원래 그렇다는 것을, 그러니까 고레에다의 영화가 닿고 싶어 하는 그 무언가를 이미 실현 중이다. 그러니 적어도 지금의 나는, 키키 키린이 등장하지 않는 고레에다의 영화는 보고 싶지가 않다.
영화평론가